2013년 7월 31일 수요일

명시 100선을 마치고

정끝별 시인은
일상의 언어를 탁월한 시적 언어로 탈바꿈시키는 정끝별(44·명지대 국문과 교수) 시인은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 등 생의 상반된 것들이 부닥치며 만들어 내는 파열음을 깊이 응시하는 시를 써 왔다. '크나큰 잠' 외 14편의 시로 올해 '소월시 문학상'을 받아 시인으로서 웅비(雄飛)의 순간을 맞았다. 시집 '자작나무 내 인생', '삼천갑자 복사빛' 등을 엮었고, 평론가이자 국문학자로서 '패러디 시학', '한국 시의 미학적 패러다임과 시학적 전통' 등 여러 평론집과 연구서를 펴냈다.

문태준 시인은
문태준(38) 시인의 시 세계는 불교적 윤회와 무소유의 세계관에 뿌리를 두고 있다.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문명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시인이다. '그맘때에는', '가재미', '극빈' 등 이미 시 애호가들 사이에 애송시가 된 그의 시들은 특유의 부드럽고 조용한 언어로 삶을 위로하고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시집 '수런거리는 뒤란', '맨발', '가재미' 등을 썼다. 노작문학상, 미당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받았다.
진행은 문학평론가 김수이 경희대 교양학부 교수가 맡았다.


▲ ‘애송시 100편’연재를 마친 정끝별(가운데) 시인과 문태준 시인이 좌담을 통해“독자와 함께 시를 즐긴 시간이었다”고 열띤 호응에 감사했다.
이날 좌담을 진행한 문학평론가 김수이 교수.

―연재 내내 반응이 뜨거웠다. 우리 국민들이 시를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최근에는 시에 대한 관심이 크게 위축돼 있었는데 이번 애송시 연재가 식어가던 시에 대한 관심을 다시 불러 일으킨 계기가 됐다.

▲문태준=격려 전화와 이메일을 많이 받았다. "우리가 할 일인데 대표로 고생한다"며 동료 시인들도 계속 격려해 줬다. 그런데 솔직히 고백하자면 연재에 대한 부담 때문에 넉 달 넘게 스트레스도 적지 않게 받았다. 이제 풀려났다고 생각하니 정말 홀가분하다.(웃음)

▲정끝별=평소 친분이 있던 한 대학 교수가 이메일을 보내 "조선일보에 소개된 애송시들로 학생들 가르치고 있다. 잘 읽고 있으니 힘내라"고 하더라. 신문에 연재되고 있는 시가 바로 교육 현장에서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신선한 충격이었고, 우리가 하는 일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했다. 나도 학교(명지대 국문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연재된 애송시들을 외우게 할 생각이다.

―두 시인의 해설 방식이 아주 새로웠다. 기존의 시 연재에서 볼 수 있던 단순한 시 이론 설명이나 감상기가 아니라 시가 쓰인 곳에서 바로 시 해설을 듣는 현장감이 느껴졌다. 가령 소개된 시가 실렸던 시집의 가격이 600환이었다는 식의 뒷얘기가 읽을거리로 더해져 시평을 풍성하게 했다. 전문지의 이론 소개와 신문의 가독성이 결합해 시 해설의 새로운 모범을 세웠다는 평가를 하고 싶다.

▲문=시평 연재를 시작할 때 이 글을 어떻게 쓸까를 놓고 자문했다. 딱딱하게 썼다가 시를 오히려 독자들로부터 떼어놓는 결과가 나온다면 시단과 독자 모두에 죄를 짓는 것 아닌가. 돌이켜보면 나름 성공한 것 같은데, 그것을 확신하게 하는 일화가 있었다. 한 독자가 이메일을 보내와 "우리 집 조상이 남긴 시가 있는데 그분의 시를 보내줄 테니 신문에 해설 쓴 형식으로 써서 보내줄 수 있느냐"고 하더라.

▲정=꼼꼼히 읽고 예리한 지적을 하는 독자들도 많았다.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 방'의 '방'을 내가 '~에서'라고 해석했더니 한 독자가 당시 일어로 '방'은 '~앞'이라는 뜻이라는 의견을 보내왔다. 시 해설을 연재하며 누구를 가르친다기보다는 "독자와 함께 시를 즐긴다"는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해 준 편지였다.

―해설자들이 개인적인 취향으로 시를 고르기보다는 100명의 시인들이 시를 추천하는 형식을 취한 것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어느 한 경향으로 편중되지 않은 다양한 시가 소개됐다. 한국 현대 시문학사의 큰 별인 김소월 김수영의 시와 2000년대 시단에서도 젊은 축에 속하는 안현미 김경주 같은 시인들의 시가 나란히 소개된 것이 참신했다.

▲문=시 연재를 하며 '베스트 시 100'이 아니라 '애송시 100'으로 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처음부터 애송시를 추천해 달라고 부탁해서인지 문학사적 의미를 따지기보다는 입에 착착 붙는 시들이 많았다. 가령 한하운의 시 '보리피리'는 음악적 요소가 강해 국민들이 정겹게 따라 부르는 작품이어서 선택된 경우다. 만약 시적인 완성도를 기준으로 했다면 다른 작품들이 추천 받았을 것이다.

―연재를 하면서 어려움은 없었는가. 우리 시단 100년의 역사를 단 100편의 시만으로 축약해 보여주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것 같다.

▲정=연재할 시들의 정본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를 정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맞춤법조차 확립되지 않았을 때 쓰인 시들이 다수였고, 개정판을 낼 때 시인 스스로 작품을 고친 경우도 있었다. 사투리 처리 문제도 늘 고민거리였다. 이용악의 '전라도 가시내'의 원문에 '눈포래'라는 방언이 나온다. 그걸 '눈보라'로 고쳐 소개한 시를 보니 이해하기는 좋은 데 시 원문의 맛이 사라지더라. 독자의 이해를 우선해야 할지, 시인이 고른 말을 살려야 할지, 늘 고민하고 망설였다.

―올해로 최남선의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발표된 지 100주년을 맞았다. 현대시 100주년을 문학사적으로 정리해야 할 필요도 있겠지만, 국민들과 함께 시 부흥 캠페인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기도 하다. 시단과 언론이 함께 만든 '애송시 100편' 시리즈는 '시 100주년을 기리는 축제'였다고 생각된다.

▲정=이번 연재로 시에 대한 일반의 관심이 높아진 것은 분명하다. 한번은 경제인 친목모임에서 "조찬 모임이 있는데 시 강연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부탁하더라. 사회가 돈에만 관심을 보이면 품격이 낮아진다. 문화적 소양을 갖춘 경제 전문가들이 많은, 품격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우리 연재가 보탬이 되기를 바란다.

▲문=지방자치단체들이 문화행정에 관심을 표명하게 된 것도 이번 연재의 보람으로 꼽고 싶다. 서울 강남구가 지난 4월 한 달을 '시의 달'로 선포했다. 버스정류장에 시가 나붙었고, 거리를 달리는 버스에 광고 대신 시가 쓰였다. 시인들이 지하철역 입구에서 즉석 강연을 하기도 했다. 마산시도 5월 3일 '마산 시의 도시' 선포식을 가졌다. 안산에 시 공원이 만들어진다는 소식도 들었다.

―시 100편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큰 문화적 파급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래서 더더욱 이번 연재가 일회성 잔치로만 끝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학은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자라나는 나무다. 시의 새로운 100년을 위한 새로운 문화운동이 필요하다.

▲정=사실 신문 연재라고 하면 늘 소설 연재만을 떠올렸다. 시가 이처럼 훌륭한 연재가 될 줄은 시인인 나도 몰랐다. 시를 위해 매일 새로운 일러스트가 그려진다는 것도 신선했다.

▲문=이번 연재는 문학이 소통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하는 계기를 줬다. 시를 독자에게 보여주는 방식을 조금 다르게 했을 뿐인데도 앞으로 맞을 새로운 시의 100년에 희망을 갖게 됐다. 시가 글로만 읽히거나 낭송되지만 말고 다양한 방식으로 독자를 찾아가야 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 김 영 랑 ) - 명시 100선 100

모란이 피기까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 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설움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 희 성 ) - 명시 100선 99

저문강에 삽을 씻고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1978년> 

- 정희성 -

오산 인터체인지 ( 조 병 화 ) - 명시 100 선 98

오산 인터체인지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등(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초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 조병화 -

맨발 ( 문 태 준 ) - 명시 100선 97

맨발 


어물전 개조개 한마리가 움막 같은 몸 바깥으로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죽은 부처가 슬피 우는 제자를 위해 관 밖으로 잠깐 발을 내밀어 보이듯이
맨발을 내밀어 보이고 있다
펄과 물속에 오래 담겨 있어 부르튼 맨발
내가 조문하듯 그 맨발을 건드리자 개조개는
최초의 궁리인 듯 가장 오래하는 궁리인 듯 천천히 발을 거두어갔다
저 속도로 시간도 길도 흘러왔을 것이다
누군가를 만나러 가고 또 헤어져서는 저렇게 천천히 돌아왔을 것이다
늘 맨발이었을 것이다
사랑을 잃고서는 새가 부리를 가슴에 묻고 밤을 견디듯이 맨발을 가슴에 묻고
슬픔을 견디었으리라
아- 하고 집이 울 때
부르튼 맨발로 양식을 탁발하러 거리로 나왔을 것이다
맨발로 하루 종일 길거리에 나섰다가
가난의 냄새가 벌벌벌벌 풍기는 움막 같은 집으로 돌아오면
아- 하고 울던 것들이 배를 채워


저렇게 캄캄하게 울음도 멎었으리라


- 문태준

비망록 ( 김 경 미 ) - 명시 100선 96

비망록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네 살이었다. 신(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졸이며 숨어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네 해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석류 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네 살엔 좀 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 같은 사내와 좀 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 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 김경미 -

인 파이터 코끼리군의 엽서 ( 이 장 욱 ) - 명시 100선 95

인 파이터 코끼리군의 엽서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벙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텝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가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 이장욱 -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 끝 별 ) - 명시 100선 94

가지가 담을 넘을 때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2005년>

 - 정 끝별

감나무 ( 이 재 무 ) - 명시 100선 93

감나무


감나무 저도 소식이 궁금한 것이다
그러기에 사립 쪽으로는 가지도 더 뻗고
가을이면 그렁그렁 매달아놓은
붉은 눈물
바람결에 슬쩍 흔들려도 보는 것이다
저를 이곳에 뿌리박게 해놓고
주인은 삼십년을 살다가
도망 기차를 탄 것이
그새 십오년인데……
감나무 저도 안부가 그리운 것이다
그러기에 봄이면 새순도
담장 너머 쪽부터 내밀어 틔워보는 것이다

 <1996년>

 - 이재무 -

참깨를 털면서 ( 김 준 태 ) - 명시 100선 92

참깨를 털면서


산그늘 내린 밭 귀퉁이에서 할머니와 참깨를 턴다.
보아하니 할머니는 슬슬 막대기질을 하지만
어두워지기 전에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젊은 나는
한번을 내리치는 데도 힘을 더한다.
세상사에는 흔히 맛보기가 어려운 쾌감이
참깨를 털어대는 일엔 희한하게 있는 것 같다.
한번을 내리쳐도 셀 수 없이
솨아솨아 쏟아지는 무수한 흰 알맹이들
도시에서 십 년을 가차이 살아본 나로선
기가막히게 신나는 일인지라
휘파람을 불어가며 몇 다발이고 연이어 털어댄다.
사람도 아무 곳에나 한 번만 기분좋게 내리치면
참깨처럼 솨아솨아 쏟아지는 것들이
얼마든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정신없이 털다가
"아가, 모가지까지 털어져선 안 되느니라"


할머니의 가엾어하는 꾸중을 듣기도 했다. 

- 김준태

거짓말을 타전하다 ( 안 현 미 ) - 명시 100선 91

거짓말을 타전하다

.
여상을 졸업하고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아현동 산동네에서 살았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사무원으로 산다는 건 한 달치의 방과 한 달치의 쌀이었다 그렇게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 살았다 꽃다운 청춘을 팔면서도 슬프지 않았다 가끔 대학생이 된 친구들을 만나면 말을 더듬었지만 등록금이 없어 학교에 가지 못하던 날들은 이미 과거였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비키니 옷장 속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할 때도 말을 더듬었다 우우, 우, 우 일요일엔 산 아래 아현동 시장에서 혼자 순대국밥을 먹었다 순대국밥 아주머니는 왜 혼자냐고 한번도 묻지 않았다 그래서 고마웠다 고아는 아니었지만 고아 같았다


여상을 졸업하고 높은 빌딩으로 출근했지만 높은 건 내가 아니었다 높은 건 내가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 꽃다운 청춘을 바쳤다 억울하진 않았다 불 꺼진 방에서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나 대신 잘 살고 있었다 빛을 싫어하는 것 빼곤 더듬이가 긴 곤충들은 나와 비슷했다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불 꺼진 방 번개탄을 피울 때마다 눈이 시렸다 가끔 70년대처럼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고 싶었지만 더듬더듬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내 이마를 더듬었다 우우, 우, 우 가족은 아니었지만 가족 같았다 꽃다운 청춘이었지만 벌레 같았다 벌레가 된 사내를 아현동 헌책방에서 만난 건 생의 꼭 한 번은 있다는 행운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더듬이가 긴 곤충들과 진짜 가족이 되었다 꽃다운 청춘을 바쳐 벌레가 되었다 불 꺼진 방에서 우우, 우, 우 거짓말을 타전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거짓말 같은 시를! 

<2006년> 

- 안현미 -

추일서정 ( 김 광 균 ) - 명시 100선 90

추일서정 


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즈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어 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차가 들을 달린다.
포플라나무의 근골(筋骨) 사이로
공장의 지붕은 흰 이빨을 드러내인 채
한가닥 꾸부러진 철책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 우에 세로팡지로 만든 구름이 하나.
자욱―한 풀버레 소리 발길로 차며
호을로 황량한 생각 버릴 곳 없어
허공에 띄우는 돌팔매 하나.
기울어진 풍경의 장막 저쪽에


고독한 반원을 긋고 잠기어간다

. <1947년>


- 김광균

철길 ( 김 정 환 ) - 명시 100선 89

철길 


철길이 철길인 것은
만날 수 없음이
당장은, 이리도 끈질기다는 뜻이다.
단단한 무쇳덩어리가 이만큼 견뎌오도록
비는 항상 촉촉히 내려
철길의 들끓어오름을 적셔주었다.
무너져내리지 못하고
철길이 철길로 버텨온 것은
그 위를 밟고 지나간 사람들의
희망이, 그만큼 어깨를 짓누르는
답답한 것이었다는 뜻이다.
철길이 나서, 사람들이 어디론가 찾아나서기 시작한 것은 아니다.
내리깔려진 버팀목으로, 양편으로 갈라져
남해안까지, 휴전선까지 달려가는 철길은
다시 끼리끼리 갈라져
한강교를 건너면서
인천 방면으로, 그리고 수원 방면으로 떠난다.
아직 플랫포옴에 머문 내 발길 앞에서
철길은 희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끈질기고, 길고
거무튀튀하다.
철길이 철길인 것은
길고 긴 먼 날 후 어드메쯤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우리가 아직 내팽개치지 못했다는 뜻이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길이 이토록 머나먼 것은
그 이전의, 떠남이
그토록 절실했다는 뜻이다.
만남은 길보다 먼저 준비되고 있었다.
아직 떠나지 못한 내 발목에까지 다가와
어느새 철길은
가슴에 여러 갈래의 채찍 자욱이 된다. 


 - 김정환 -

낙화 ( 이 형 기 ) - 명시 100선 88

낙화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봄 한철
격정을 인내한
나의 사랑은 지고 있다.
분분한 낙화……
결별이 이룩하는 축복에 싸여
지금은 가야 할 때,
무성한 녹음과 그리고
머지않아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헤어지자
섬세한 손길을 흔들며
하롱하롱 꽃잎이 지는 어느 날
나의 사랑, 나의 결별,
샘터에 물 고이듯 성숙하는


내 영혼의 슬픈 눈


.- 이형기

껍데기는 가라 (신 동 엽 ) - 명시 100선 87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껍데기는 가라
동학년(東學年) 곰나루의, 그 아우성만 살고
껍데기는 가라.
그리하여, 다시
껍데기는 가라.
이곳에선, 두 가슴과 그곳까지 내논
아사달 아사녀가
중립의 초례청 앞에 서서
부끄럼 빛내며
맞절할지니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1967년>


- 신동엽 - 

서시 ( 이 시 영 ) - 명시 100선 86


서시


어서 오라 그리운 얼굴
산 넘고 물 건너 발 디디러 간 사람아
댓잎만 살랑여도 너 기다리는 얼굴들
봉창 열고 슬픈 눈동자를 태우는데
이 밤이 새기 전에 땅을 울리며 오라


어서 어머님의 긴 이야기를 듣자

 <1976년>

 - 이시영 -

낙화 ( 조 지 훈 ) - 명시 100선 85

낙화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 조지훈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 광 규 ) - 명시 100선 84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김광규 -

솟구쳐 오르기 ( 김 승 희 ) - 명시 100선 83

솟구쳐 오르기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이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 김승희

해바라기의 비명 ( 함 현 수 ) - 명시 100선 82

해바라기의 비명  - 청년화가 L을 위하여


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거운 비(碑)ㅅ돌을 세우지 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 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 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 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 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 함현수

보리 피리 (한 하 운 ) - 명시 100선 81

보리피리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린 때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人還)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리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幾山河)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 한하운 -

갈대등보 ( 신 용 목 ) - 명시 100선 80

갈대등보


무너진 그늘이 건너가는 염부 너머 바람이 부리는 노복들이 있다
언젠가는 소금이 설산(雪山)처럼 일어서던 들
누추를 입고 저무는 갈대가 있다
어느 가을 빈 둑을 걷다 나는 그들이 통증처럼 뱉어내는 새떼를 보았다 먼 허공에 부러진 촉 끝처럼 박혀 있었다
휘어진 몸에다 화살을 걸고 싶은 날은 갔다 모든 모의(謀議)가 한 잎 석양빛을 거느렸으니
바람에도 지층이 있다면 그들의 화석에는 저녁만이 남을 것이다
내 각오는 세월의 추를 끄는 흔들림이 아니었다 초승의 낮달이 그리는 흉터처럼
바람의 목청으로 울다 허리 꺾인 가장(家長)


아버지의 뼈 속에는 바람이 있다 나는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 

- 신용목 -

투명한 속 ( 이 하 석 ) - 명시 100선 79

투명한 속 


유리 부스러기 속으로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 어려온다, 먼지와 녹물로
얼룩진 땅, 쇠 조각들 숨은 채 더러는 이리저리 굴러다닐 때,
버려진 아무 것도 더 이상 켕기지 않을 때,
유리 부스러기 흙 속에 깃들어 더욱 투명해지고
더 많은 것들 제 속에 품어 비출 때,
찬란한, 선명하고 쓸쓸한, 고요한 남빛 그림자는
확실히 비쳐 온다.
껌종이와 신문지와 비닐의 골짜기,
연탄재 헤치고 봄은 솟아 더욱 확실하게 피어나
제비꽃은 유리 속이든 하늘 속이든 바위 속이든
비쳐 들어간다. 비로소 쇠 조각들까지
스스로의 속을 더욱 깊숙이 흙 속으로 열며.

 <1980년>

- 이하석 - 

일찍이 나는 ( 최 승 자 ) - 명시 100선 78

일찍이 나는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더기에 뒤덮인 천년 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먹고
아무 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너를모른다 나는너를모른다.
너당신그대, 행복
너, 당신, 그대, 사랑
내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1981년>

- 최승자 -

국토서시 ( 조 태 일 ) - 명시 100선 87

국토서시

발바닥이 다 닳아 새 살이 돋도록 우리는
우리의 땅을 밟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숨결이 다 타올라 새 숨결이 열리도록 우리는
우리의 하늘 밑을 서성일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야윈 팔다리일망정 한껏 휘저어
슬픔도 기쁨도 한껏 가슴으로 맞대며 우리는
우리의 가락 속을 거닐 수밖에 없는 일이다.
버려진 땅에 돋아난 풀잎 하나에서부터
조용히 발버둥치는 돌멩이 하나에까지
이름도 없이 빈 벌판 빈 하늘에 뿌려진
저 혼에까지 저 숨결에까지 닿도록
우리는 우리의 삶을 불 지필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숨결을 보탤 일이다.
일렁이는 피와 다 닳아진 살결과
허연 뼈까지를 통째로 보탤 일이다.

<1975년>

- 조태일 -

조국 ( 정 완 용 ) - 명시 100선 76



조국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애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
둥기둥 줄이 울면 초가삼간 달이 뜨고
흐느껴 목 메이면 꽃잎도 떨리는데
푸른 물 흐르는 정에 눈물 비친 흰 옷자락.
통곡도 다 못하여 하늘은 멍들어도
피맺힌 열두 줄은 구비 구비 애정인데
청산아 왜 말이 없이 학(鶴)처럼만 여위느냐.



<1962년>

- 정완용 -

절벽 (이 상 ) - 명시 100선 75

절벽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차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 이상

절벽 ( 이 상 ) - 명시 100선 74

절벽


꽃이보이지않는다. 꽃이향기롭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거기묘혈을판다.
묘혈도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속에나는들어앉는다.
나는눕는다. 또꽃이향기롭다. 꽃은보이지않는다.
향기가만개한다. 나는잊어버리고재차거기묘혈을판다.
묘혈은보이지않는다. 보이지않는묘혈로나는꽃을깜빡잊어버리고들어간다.
나는정말눕는다. 아아. 꽃이또향기롭다. 보이지않는꽃이―보이지도않는꽃이.

  - 이상

반성 704 (김 영 승 ) - 명시 100선 73

반성 704 


밍키가 아프다
네 마리 새끼가 하도 젖을 파먹어서 그런지
눈엔 눈물이 흐르고
까만 코가 푸석푸석 하얗게 말라붙어 있다
닭집에 가서 닭 내장을 얻어다
끓여도 주어보고
생선가게 아줌마한테 생선 대가리를 얻어다 끓여 줘 봐도
며칠째 잘 안 먹는다
부엌 바닥을 기어다니며
여기저기 똥을 싸 놓은 강아지들을 보면
낑낑낑 밍키를 보며 칭얼대는
네 마리 귀여운 강아지를 보면


나는 꼭 밍키의 남편 같다.

 <1987년> 

- 김 영 승

마음의 수수밭 ( 천 양 희 ) - 명시 100선 72

마음의 수수밭


마음이 또 수수밭을 지난다.
머위잎 몇장 더 얹어 뒤란으로 간다.
저녁만큼 저문 것이 여기 또 있다
개밥바라기별이
내 눈보다 먼저 땅을 들여다본다
세상을 내려놓고는 길 한쪽도 볼 수 없다
논둑길 너머 길 끝에는 보리밭이 있고
보릿고개를 넘은 세월이 있다
바람은 자꾸 등짝을 때리고, 절골의
그림자는 암처럼 깊다. 나는
몇 번 머리를 흔들고 산 속의 산,
산 위의 산을 본다. 산은 올려다보아야
한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저기 저
하늘의 자리는 싱싱하게 푸르다.
푸른 것들이 어깨를 툭 친다. 올라가라고
그래야 한다고. 나를 부추기는 솔바람 속에서
내 막막함도 올라간다. 번쩍 제정신이 든다.
정신이 들 때마다 우짖는 내 속의 목탁새들
나를 깨운다. 이 세상에 없는 길을
만들 수가 없다. 산 옆구리를 끼고
절벽을 오르니, 천불산(千佛山)이
몸속에 들어와 앉는다.
내 맘속 수수밭이 환해진다. 

<1994 년> 

- 천양희 -

진 달 래 ( 소월 ) - 명시 100선 71

진달래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영변(寧邊)에 약산(藥山)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 소월

방심 ( 손 택 수 ) - 명시 100선 70

방심 

한낮 대청마루에 누워 앞뒤 문을 열어
놓고 있다가, 앞뒤 문으로 나락드락
불어오는 바람에 겨드랑 땀을 식히고 있다가,
스윽, 제비 한마리가,
집을 관통했다
그 하얀 아랫배,
내 낯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한순간에,
스쳐지나가버렸다
집이 잠시 어안이 벙벙
그야말로 무방비로
앞뒤로 뻥
뚫려버린 순간,
제비 아랫배처럼 하얗고 서늘한 바람이
사립문을 빠져 나가는 게 보였다 내 몸의
숨구멍이란 숨구멍을 모두 확 열어젖히고

 - 손택수 -

이탈한 자가 문득 (김 중 식 ) - 명 시 100선 68

이탈한 자가 문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김중식 -

농무 ( 신 경 림 ) - 명시 100선 69

농무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주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아예 여편네에게나 맡겨두고
쇠전을 거쳐 도수장 앞에 와 돌 때
우리는 점점 신명이 난다
한 다리를 들고 날나리를 불거나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나


- 신경림 -

칼 로 사과를 먹다 ( 황 인 숙 ) - 명시 100선 67

칼로 사과를 먹다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 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 황인숙 -

의자 ( 이 정 록 ) - 명시 100선 66

의자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2006년>

- 이정록

생명의 서 ( 유 치 환 ) - 명시 100선 65

생명의 서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유치환 -

섬진강 (김 용 택) - 명시 100선 64

섬진강 


가문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퍼가도 퍼가도 전라도 실핏줄 같은
개울물들이 끊기지 않고 모여 흐르며
해 저물면 저무는 강변에
쌀밥 같은 토끼풀꽃,
숯불 같은 자운영꽃 머리에 이어주며
지도에도 없는 동네 강변
식물도감에도 없는 풀에
어둠을 끌어다 죽이며
그을린 이마 훤하게
꽃등도 달아준다
흐르다 흐르다 목메이면
영산강으로 가는 물줄기를 불러
뼈 으스러지게 그리워 얼싸안고
지리산 뭉툭한 허리를 감고 돌아가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섬진강물이 어디 몇 놈이 달려들어
퍼낸다고 마를 강물이더냐고,
지리산이 저문 강물에 얼굴을 씻고
일어서서 껄껄 웃으며
무등산을 보며
그렇지 않느냐고 물어보면
노을 띤 무등산이
그렇다고 훤한 이마 끄덕이는
고갯짓을 바라보며
저무는 섬진강을 따라가며 보라
어디 몇몇 애비 없는 후레자식들이
퍼간다고 마를 강물인가를. 


- 김용택 -

그리스도 폴의 강 (구 상) - 명시 100선 63

그리스도 폴의 강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 끼어 있다.
피안(彼岸)을 저어 가듯
태백(太白)의 허공속을
나룻배가 간다.
기슭, 백양목(白楊木) 가지에
까치가 한 마리
요란을 떨며 날은다.
물밑의 모래가
여인네의 속살처럼
맑아 온다.
잔 고기떼들이
생래(生來)의 즐거움으로
노닌다.
황금(黃金)의 햇발이 부서지며
꿈결의 꽃밭을 이룬다.
나도 이 속에선
밥 먹는 짐승이 아니다.


 - 구상 - 

눈물 (김 현 승) - 명시 100선 62

눈물


더러는
옥토(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생명(生命)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은
나의 전체(全體)는 오직 이뿐!
더욱 값진 것으로
들이라 하올제,
나의 가장 나아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 

- 김현승 -

2013년 7월 30일 화요일

노동의 새벽 (박 노 해) - 명시 100선 61

노동의 새벽 


전쟁 같은 밤일을 마치고 난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이러다간 오래 못가지
이러다간 끝내 못가지
설은 세 그릇 짬밥으로
기름투성이 체력전을
전력을 다 짜내어 바둥치는
이 전쟁 같은 노동일을
오래 못가도
끝내 못가도
어쩔 수 없지
탈출할 수만 있다면,
진이 빠져, 허깨비 같은
스물아홉의 내 운명을 날아 빠질 수만 있다면
아 그러나
어쩔 수 없지 어쩔 수 없지
죽음이 아니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질긴 목숨을,
가난의 멍에를,
이 운명을 어쩔 수 없지
늘어쳐진 육신에
또다시 다가올 내일의 노동을 위하여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를 붓는다
소주보다 독한 깡다구를 오기를
분노와 슬픔을 붓는다
어쩔 수 없는 이 절망의 벽을
기어코 깨뜨려 솟구칠
거치른 땀방울, 피눈물 속에
새근새근 숨쉬며 자라는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
우리들의 희망과 단결을 위해
새벽 쓰린 가슴 위로
차거운 소주잔을
돌리며 돌리며 붓는다
노동자의 햇새벽이
솟아오를 때까지 

- 박노해 -

울음이 타는 강 (박 재 샹) - 명시 100선 60

울음이 타는 강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강(江)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와 가는,


소리죽은 가을강(江)을 처음 보것네.

- 박 재 상 -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 장 정 일 ) - 명시 100선 59


사철나무 그늘아래 쉴 때는


그랬으면 좋겠다 살다가 지친 사람들
가끔씩 사철나무 그늘 아래 쉴 때는
계절이 달아나지 않고 시간이 흐르지 않아
오랫동안 늙지 않고 배고픔과 실직
잠시라도 잊거나
그늘 아래 휴식한 만큼 아픈 일생이
아물어진다면
좋겠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굵직굵직한 나무등걸 아래 앉아
억만 시름 접어 날리고
결국 끊지 못했던 흡연의 사슬
끝내 떨칠 수 있을 때
그늘 아래 앉은 그것이 그대로
하나의 뿌리가 되어
나는 지층 가장 깊은 곳에 내려앉은
물맛을 보고
수액이 체관 타고 흐르는 그대로
한됫박 녹말이 되어
나뭇가지 흔드는 어깨짓으로 지친
새들의 날개와
부르튼 구름의 발바닥 쉬게 할 수 있다면
좋겠다 사철나무 그늘 아래 또 내가 앉아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내가 나밖에 될 수 없을 때
이제는 홀로 있음이 만물 자유케 하며
스물 두 살 앞에 쌓인 술병
먼 길 돌아서 가고
공장들과 공장들 숱한 대장간과
국경의 거미줄로부터
그대 걸어나와 서로의 팔목 야윈
슬픔 잡아 준다면
좋을 것이다 그제서야 조금씩
시간의 얼레도 풀어져
초록의 대지는 저녁 타는 그림으로
어둑하고
형제들은 출근에 가위 눌리지 않는
단잠의 베개 벨 것인데
한 켠에선 되게 낮잠을 자 버린 사람들이 나즈막히 노래불러
유행 지난 시편의 몇 구절을 기억하겠지
바빌론 강가에 앉아
사철나무 그늘을 생각하며 우리는


눈물 흘렸지요

 - 장정일

수목정원 ( 장 석 남 ) - 명시 100선 58

수묵정원 9-번짐 


번짐,
목련꽃은 번져 사라지고
여름이 되고
너는 내게로
번져 어느덧 내가 되고
나는 다시 네게로 번진다
번짐,
번져야 살지
꽃은 번져 열매가 되고
여름은 번져 가을이 된다
번짐,
음악은 번져 그림이 되고
삶은 번져 죽음이 된다
죽음은 그러므로 번져서
이 삶을 다 환히 밝힌다
또 한번저녁은 번져 밤이 된다
번짐,
번져야 사랑이지
산기슭의 오두막 한채 번져서


봄 나비 한마리 날아온다 

- 장석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