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7일 월요일

관상용 고구마


지난 추수 감사절에 yam을 조리다가 싹이 난 yam을 물에 담가두었더니 한달이 지나니 이렇게 예쁘게 자랐다. 키가 너무 크면 바침대를 세워주면 서너달은 예쁘게 자라리라.
지난번에 코누코피아의 틀을 올렸었는데 막상 그날의 코누코피아는 실패했다. 안에 지지대를 세웠는데 빵의 크기에 비해 약했던지 무거워서 옆으로 찌그러졌다. 맛은 좋아서 잘 먹었지만 따로 사진을 찍지는 않았다. 실뿌리가 이렇게 많이 벋어나왔다. 이것은 물을 갈아주지 않는다. 이 실뿌리들은 자정 능력이 있어서 이 물은 썩지 않으므로 가끔씩 물의 양을 봐서 보충해주면 된다.

어제 다음날


2018 12월 17일 '이 아침에'란에 실린 글입니다.









   “여보 오늘이 며칠이지?”요즘 직장에 출근을 하지 않고 집에서 특별한 일이 없이 지내다보니 날짜를 모르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남편이 “응, 어제 다음날.”시침을 뚝 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별 억양 없이 대꾸했다. 짓궂었지만 눈을 컴퓨터 화면에 고정한 남편을 방해하기 싫었고 또 약간은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기에 그냥 넘기기로 했다.

   글을 써 보겠다고 작심한 뒤로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난시가 있어 책을 삼십분 정도 읽으면 벌써 두통이 시작된. 내가 평생 책 읽기를 게을리 해서 책을 읽고자 마음을 정하고 보니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나 많다. 못 읽어본 고전들 뿐 아니라 예전에 읽었어도 다시 읽어볼 책이 많다. 더하여 신간들도 너무나 많은 좋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도 하나 미국 도서관에 비치한 한국책이란 독서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엔 너무 부족하다. 그래도 요즘은 여기서 삼십오 마일 밖이지만 엘에이에 한국 서점이 여럿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책을 살 수 있다. 서점에 없는 책은 주문하여 구해볼 수도 있어서 옛날에 비하면 썩 좋아진 사정이다. 그러나 비용도 많이 들뿐 아니라 보고난 뒤에 쌓이는 책들도 부담스럽다. 그래서 주위의 지인들에게 어떤 책을 읽었고, 또 좋았었는지 자주 묻게 된다.
   얼마 전에도 아는 사람에게 책을 여덟 권을 빌려왔다. 그런데 내 사정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자진하여 책을 또 다섯 권을 빌려 주었다. 물론 마다하지 않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받아왔다. 얼른 보고 곧 돌려줄 심산으로 책에 묻혀 지내다보니 날 가는 줄을 몰랐다.

   작년부터 가을에 한국 여행을 계획했었다. 이십일 년 만에 가는 것이니 기대를 많이 했다. 세상사가 뜻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 그 때에 시어머님이 소천하심으로 올해로 미루었었다. 단풍 철이면 좋겠지만 어머님의 일주년 추도 예배가 딱 그때여서 철을 넘겨 좀 비끼더라도 꼭 다녀오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말 예기치 않게 내 턱뼈 속에 묻혀 잠자던, 있는지도 몰랐던 사랑니가 말썽을 부렸다. 수술로 빼내고 치료받다보니 한국엔 이미 겨울 추위가 시작되었다. 기대했던 한국 여행은 또 무산되고 말았다. 여행을 취소하고 나니 올 한해가 다 밋밋했던 것 같은 기분이다.

   금년은 날씨도 춥지 않다보니 아직 세모의 기분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벌써 추수 감사절이 닥쳤으니 이해도 저물어가는 십이월이 며칠 남지 않았다. 돌아보니 올해는 그저 평탄하게 지난 것을 감사해야 할지, 책을 좀 읽은 일 외에 한 일이 별로 없다. 남편을 짓궂다고 탓하려다보니 정말 그의 말이 맞다. 오늘은 그저 담담히 어제의 다음날일 뿐으로 그렇게 지나왔다.
   그렇다고 시간이 많아서 일탈의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쫓기듯이 살지는 않아도 늘 시간이 모자라서 동동거렸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아는 사람들에게 변변히 인사도 전하지 못하고 살았다.
이제부터라도 서둘러 격조했던 친지들의 안부를 묻고 성탄과 세모의 인사를 전해야겠다. 새해는 어떻게 보내야할지도 생각도 해봐야겠다. 지나간 열한 달은 제쳐두고 남은 한 달이라도 생각 있는 자세로 보내어 한 해의 마무리를 깔끔히 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설계하려 마음을 다져본다.

어제 다음날일 뿐인‘어제 같은 오늘’’오늘 같은 내일’을 생각 없이 흘려보내지 말아야겠다. 세상사 뜻대로 안되는 경우도 있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도 있다. 어제같은 오늘이면 필연적으로 오늘같은 내일이 있을 뿐일 테니까.


2018년 11월 20일 화요일

승승 방탄 장구하라



이 글은 2018년 11월 11일 중앙일보 오피니언 이 아침에 란에 실린 글입니다.





장구하라 방탄 소년단


   2018년은 방탄 소년단의 해라고 해도 무리가 없겠다. 초 고속 시대에 걸맞는 빠른 행보와 그에 따른 성취로 다양한 최고의 연속 기록을 이뤄내는 기적같은 기세를 보고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다.

   딸이 지난 여름 휴가를  일본에서 보내면서 오는 길에  한국을 들러왔다.  전화기에 이상이 있어서 애플 상점에 갔는데 바로 옆이 방탄 소년단의 캐릭터를 취급하는 곳이었다. 값이 만만치 않아서 별 생각 없이 곰 인형을 하나 사가지고 왔다.
   돌아오자마자 때 맞추어 이곳 헐리웃에 방탄의 캐릭터를 파는 상점이 문을 열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개점 전날부터 장사진을 치고 텐트에서 밤을 지새우면서 상점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는 소식이다.  딸이 인터넷으로 한국에서 가져온 상품을 검색해봤더니 한국에서 산 가격의 두배도 넘는 값으로 유통되고 그것도 없어서 못파는 정도로 인기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럴 줄 알았으면 다른 인기 상품을 몇개 더 사가지고 왔으면 비행기값을 상쇄하고도 남을 걸 그랬다고 웃으며 말했다.
   난 그 얘기를 들었으면서도 방탄의 인기를 그리 실감하지는 못했다. 이어 신문에서 방탄이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래도 난 나와 먼 얘기처럼 무심했다.  소녀시대나 싸이처럼 좀 그러다 말겠지 하는 마음도 있었다.
   얼마 전에 방탄이 유엔에서 연설을 했고 그 연설이 사람들에게  그들의 노래 못지 않은 감동을 주었다는 기사를 봤다. “히야 제법이군!”  하다가 이게 범상치 않은 일이란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여기서 태어나고 자라는 한국 아이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일이 당연지사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참 어려운 일이다.  나는 손자가 네살 터울로 셋인데 어린 순서대로 한국말을 잘한다. 막내 손자가 제일 잘하고 제일 큰 녀석이 그 중 못한다.  아들 며느리가 한국말보다는 영어가 더 편하다. 그러니 교회에서나 학교에서 그 아이들이 한국어를 배울 기회가 없다.
   토요일에 한국학교를 보내지만 집에서 사용하지 않으니까 바램처럼 실력이 늘지를 않는다. 거기다가 아이들이 현실적인 필요성을 못 느끼니까 배우려는 의지가 전혀 없다. 시키니까 할 수 없이 억지로 시간 때움을 한다.
   얼마 전에 며느리가 아이들에게 한국어를 좀 가르쳐주면 좋겠다는 제의를 했다. 흔쾌히 허락하고 가르쳐보니 이게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우선 한국학교에서 붙은 맥 빠진 습관대로 무척 지루하고 힘겨운 일이라는 선입견으로 귀를 꼭 닫고 있었다. 어떻게 좀 흥미를 돋구어보려고 갖은 지혜를 짜내도 좀처럼 되지 않았다.
   한국사람이 영어를 배우는 데 제일 큰 어려움은 말하는 순서다. 이것이 영어권 아이들이 한국어를 배우는데도 역시 큰 걸림돌이 된다. 거기다가 한국말에는 영어에 없는 동사와 형용사에 어미 변화가 많다. 그냥 같은 의미의 단어만 치환해서는 말이 안 된다.
   방탄의 노래를 가르쳐보자 생각하고 유투브엘 들어가서 처음으로 방탄의 노래를 들었다. 가사도 받아 적었다. 그들이 왜 유명해지고  그토록 인기를 얻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세대차를 훌쩍 뛰어넘어 나도 담박 그 노래가 좋아졌기 때문이다. 노래만 좋은 것이 아니고 시적인 가사의 희망적인 메세지도 참 훌륭했다.
   가사를 적은 종이를 내밀고 음악에 맞추어 눈을 따라가라고 했더니 손자가 눈을 반짝 빛내며 받아들고 시키지 않아도 반복해서 듣는다. 흥미 유발 성공!
  
   가사는 한국말 반 영어 반으로 되어있어  아이들이 따라하기 딱 좋았다. 놀라운 것은  한국말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이 어려운 한국말의 장벽을 넘어서서 이 곡들을 좋아하게 되고 빌보드 차트를 1위로 끌어올렸다는 사실. 가사 속에는 얼쑤, 조오타, 지화자 같은 추임새도 들어있다. 정말 생각사록 믿기 힘들 정도로 신기하다. 내가 어렸을 때에 뜻도 제대로 모르면서 팝송을 듣고 외우며 좋아했었다. 그 가사가 지금도 잊지 않고 입에서 술술 나온다. 이처럼 내 손자도  평생을 잊지 않고 이 노래를 읊조리게 될게다.  덕분에 한국어의 교육이 덩달아 확실하게 되었다.
   놀라운 방탄의 위력이다.  방탄에게 아낌없는 박수와 갈채를 힘차게 보낸다.  방탄 덕분에 이 할미의 어깨가 번쩍 올라가고 짐이 가벼워졌다.

   승승하는 방탄이여 영원히 장구하라!


2018년 10월 25일 목요일

된장녀 유감





이 글은 2018년 10월 25일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란에 실린 글입니다.





된장녀 유감



   밀레니엄 시대에 돌입하면서 된장녀라는 말이 생겨났다. 자기 능력으로 소화할 수 없는 고가의 명품을 갖고 자기의 가치를 그에 의존하는 덜 떨어진 여자를 말함이다. 그게 어째서 된장녀가 되는지 정말 모르겠다. 앞 뒤가 안 맞는 신조어가 어떻게 모두에게 잘 통용이 되는지 자못 의아하다.
   된장은 한국 음식중에서 가장 친근하고 서민적인 음식인 점으로 봐도 그에 상응하지 않는 말이고 그 맛의 깊음과 영양가를 생각해도 그에 전혀 걸맞지 않는 말이다.
   왜일까?

   우선 된장을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자. 된장의 재료가 되는 콩은 곡식중에 제일 영양가가 많고 단단하다. 사람으로 치면 꼭 찬 실력과 영민함에다 강인함을 겸비했다 하겠다. 여기서부터 근본적으로 속된 된장녀의 이미지와는 정 반대다.

   메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콩을 가마솥에서 연속 다섯 시간 정도 푹 무르게 삶아야한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던 잔재주가 다 무슨 소용이랴. 뜨거운 가마솥 세상의 혹독한 시련을 다 이겨내고 인내하는 동안 옹골차던 단단함도 맥을 못추고 결국은 속까지 푹 물러져야 한다. 졸아서 진이 나고 단물이 날 때까지 지속적인 단련을 견뎌내야 한다.
   푹 삶아진 콩은 절구에 넣고 찧어 덩어리를 짓고 바짝 말린뒤에, 항아리에 짚을 켜켜이  깔아 메주를 넣고 뚜껑을 덮어서 띄운다.
밟히고 치이고 문드러져 모양도 색갈도 맛도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나의 자아는 사그리 무너지고 속이 시커멓토록 썩어야 한다. 더 나은 이상을 품은 일념의 우리만 남아있어야 한다.
   깨끗이 씻은 메주를 소금물에 담그어 불리고 덧소금을 뿌려 햇볕에 바랜다.
모두 다 내려놓았지만 꼭 붙들어야 할 것을 위해 왕소금으로 듬뿍  무장한다. 이제는 어설펐던 날들의  냄새나는 추억들, 쓰라린 아픔을 한여름 긴 볕에 바래가면서 차분히 침묵의 시간. 뚜껑을 열어놓고 조용히 곰삭아야 한다.
   그래야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소증* 푸는,
   속 정 나는
   노오란 속장이 만들어진다.

   된장은 육해공海空 동식물의 어느 재료를 사용해도, 또 어떤 조리법을 써도 다  잘 어울리는 전천후의 품 넓은 고품격의 음식이다. 가장 싸고 흔한 재료나 비싸고 좋은 재료나간에 된장을 조금 첨가하면 깊은 맛을 더해 세상 어느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요리가 된다.
   푸른 나물을 무칠때도 그렇고, 비린생선이나 누린 고기류를 조리할 때도 그렇다.
프랑스의 고급 요리를 할 때에도 된장을 조금 넣으면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특별한 요리가 되어 세프를 일류로 출세시킨 예도 있다.   

   나는 된장녀야말로 우리 어머님께나 올려드려야 할 명예로운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성에게는 옴짝 달싹도 못하는 족쇄를 씌웠던 그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일제 강점기의 혹독한 억압, 해방과 건국의 혼란한 소용돌이, 육이오 동란의 끔찍한 사선을 넘어오신 분이다. 
   질곡의 수난시대를 거치며 살신성인의  골짜기와 등성이를 수없이 오르내리는 그 역경 가운데서 지상의 천국인 가정을 지켜내시고, 자녀를 등 따습고 배 부르게 길러내신 그 여정이야말로 된장이 만들어지는 고비고비의 발효와 숙성 과정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
   어디 그 풋 비린내 나는 날콩같은 여자들에게 붙여줄 이름인가?

   해마다 정한 날을 받고 온갖 정성을 들여 쓰다듬고 다독이며 장을 담그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나는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된장녀라는 말. 아마도 가늠하기로는 된장을 수없이 즐겨 먹었으면서도 된장이 무언지 모르는 알맹이 빠진 껍데기같은 젊은 세대들이 생각없이 만들어 쓰는 말이라 생각된다.

   세월은 칼같이 냉혹하여, 따끈하고 달콤했던 어머님의 보글보글 그 된장찌게는 다시는 천금을 주어도 재현될 수 없는 지금이다! 바라기는 여자라면 누구나 명품 가방을 가져서  된장녀가 아닌  인격자체가 고품격을 갖춘 진정 된장녀가 되는 것을 지양해야 하리라.


*소증(素症):간절히 먹고싶은 증세.식만 하여 고기가 먹고 싶은 증세. 소증 나면 병아리만 봐도 는다.


2018년 10월 9일 화요일

한글날에 돌아본 반성



이글은 미주 중앙일보 2018년 10월 9일 오피이언 '이 아침에'란에 '한글날에 반성합니다,' 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오염된 일상어

   부끄럽게도 아직 나는 영어가 무섭다. 그럼에도 내 일상의 언어 가운데는 영어가 많이 섞여있다. 좋은 한국말이 있는데도 영어가 먼저 튀어나온다. 이런 나를 두고 남편은 처음부터 영어로만 말하든지 아니면 모두 한국말로 하라고 핀잔을 주어 찬물을 뒤집어 쓴 듯 머쓱하게 만든다. 주제 파악을 못하고 주체를 잃어버린 상황이니 지당한 얘기다. 영어를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터에 영어를 더 잘하는 사람에게 지적을 받은 부끄러움에 할 말이 없다.
   왜 이런 반갑지 않은 습관이 붙었을까? 일상생활에서 많이 만나고 부딪힌 경험에 따라 익숙해진 말이 먼저 튀어나오는 때문다. 영어만도 아니다. 스페니쉬까지도 섞여있다. 체계적인 언어를 공부한 게 아니다. 내가 오랫동안 생산 공장에서 히스패닉 사람들과 함께 일하는 동안에 몸으로 배운 말이다. 그 사람들도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많다. 일하는 현장에서 눈치껐 서로 답답한 가슴을 치면서 울고 웃으며 콩나물 다듬듯 머리와 꼬리를 잘라내고 명사와 동사만을 나열하배운 말이다. 그러니 실제 상황에 수없이 부딪치며 써먹은 단어들이라서 나에게는 아주 매끄럽게 익숙하다.
   그러다보니 우습게도 영어로 말을 하다가 무심코 스페니쉬 단어를 섞어서 말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스페니쉬를 모르는 상대가 못 알아듣고 짓는 의아한 표정을 보고서야 깨우쳐 얼른 고쳐 말하곤 한다. 상대편에서 볼 때에는 가뜩이나 발음도 나쁘고 영어도 서툰 사람이 엉뚱하게 스페니쉬까지 섞어 비벼놓았으니 얼마나 황당할까? 진풍경 코메디가 따로 없다.
  
   요즘은 모국어인 한국말도 서툴다. 한국 젊은이들의 말은 억양까지도 옛날과는 상당히 다르다. 또 인터넷 안에서의 말들은 구겨지고 잘려서 도무지 뜻을 가늠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긴 생활이 옛날과 많이 다르다보니 언어도 그에 따라 변천되어간다. 허나 지나치는 조급함과 천박함 경향이 있다. 이렇게 빨리 말들이 변해간다면 아마 함께 공존하는 세대간에도 통역을 써야만 대화가 가능한 황당한 일이 생기지 않을까 두렵다. 만일 이렇게 된다면 구세대에게는 물론이려니와 신세대에게도 큰 재앙이 될게 분명하다.
   지금 우리는 한자로 인해 빼앗긴 우리말의 영역을 모두 되찾기에는 한참 먼 상황이다. 거기다 우리말의 성장 속도로는 문화의 팽창속도를 감당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 외래어를 꼭 섞어 쓰지 않을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더욱이 반세기 이상을 담 쌓고 살아온 반쪽 나라가 통일이 된다면 언어의 혼란이 더 말 할 수 없이 많을 게다. 우리 말은 이 혼란을 어떻게 겪어나갈지 의문이다. 실생활에 맞추어 새로이 생겨나는 말들은 의사소통을 고 언어를 살찌운다. 한편, 사라져가는 고운 말들도 꼭 붙잡아서 우리의 생각과 문화를 바르고 풍성하게 가꾸어 나가야 하겠다.
   말은 자꾸 써야 익숙해져서 자기의 것이 되고 서로간의 소통의 구실도 하게 된다. 고운 우리말과 함께 세계적으로 으뜸인 우리 글을 두고두고 오는 세대에 자랑으로 남겨주어야겠다. 이는 무심함으로 넘겨버릴 일이 절대 아니다. 상당한 지속적인 노력이 필요하겠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관심을 갖고 유념하여 함께 힘써야 할 일이다.
   글짓기야말로 오염된 일상어들을 정화된 우리말로 아름답게 가꾸고 갈무리해 나가는 더없이 좋은 역활을 감당하리라 믿는다. 풍성한 문학의 유산이야말로 우리 문화의 다양성의 믿받침이 되고 민족의 얼과 정신세계도 맑고 깊어지는 근간이 되리라.

   생각할수록 고마운 세종대왕님!
다가올 한글날을 맞아 돌아본 반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