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27일 토요일

Brazil 여행기 3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시내로 내려와 그 유명한 코파카바나 해변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해변에 나가 발이라도 담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일정을 맞추려면 그럴 시간이 없었다.
빵지아쑤까로 갔다. 아쑤까는 설탕이란 말이고 보면 sugar bread 라는 말이다. 바다로 향하여 길게 나간 산 끝자락에 불란서 빵을 반으로 뚝 잘라서 세워놓은 것 같은 한 덩어리의 큰 돌산이었다. 이곳을 케이블카로 올라가는데 우선 빵산에 연이어 있는 산을 올라가서 다시 빵산 위로 올라가게 되어있다. 이 케이블카는 높기도 하고 길기도 했다.
저만치 서로 마주 보이는 꼴꼬바도(예수 상)에서와 같이 이곳에서도 항구가 내려다 보였다. 맑은 바다의 푸른 물빛과 들고나는 오밀 조밀한 흰 모래의 해안들, 저만치 바다 가운데 우뚝우뚝 솟은 돌산, 푸른 숲과 어우러진 하얀 별장들, 안으로 들어온 만을 이어붙인 긴 다리, 숲이 우거진 작은 섬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져서 참 아름다웠다. 세계 삼대 미항중의 하나라는 명성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21일-
아침 여섯시 반에 기상하여 짐을 꾸리고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와서 공항으로 갔다. 이과수(비행시간 한 시간 삼십분)에 도착하여 이태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버스로 파라과이로 떠났다. 산이 없는 숲과 초원을 여섯 시간을 달렸다. 모두 피곤하고 잠이 부족하고 또 배부른 후라서 골아 떨어졌다.
시골길엔 가끔씩 나타나는 마을이 초라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초원의 흙은 황토였는데 오히려 붉은색에 가까워서 적토라 해야 더 맞았다. 때때로 여기 저기 무덤의 봉분 비슷한 모양의 빨간 흙더미가 크고 작게 늘어서 있는 모양이 특이했다. 이것은 개미집이라 했다. 어떤 것은 사람의 가슴정도까지 올라올 정도로 높았다. 여기는 비가 자주오고 또 더우니까 물도 피하고 더위도 피하려고 개미가 이렇게 집을 짓는다는 거다.

아순시온의 부녀회에서 대접하는 저녁을 한식으로 먹었다. 고운 연두색의 보드라운 상추가 얼마나 예쁘던지 내 룸메이트는 여기에 와서 상추 심어먹고 살면 더없이 좋겠다고 말했다.
Asuncion Yacht Club & Resort에 늦게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파라과이에서는 국가 원수 급의 내외 귀빈이 묵는 호텔이라고 했다. 늦었지만 컨퍼런스룸에 모여 일행이신 조학산 목사님의 말씀으로 예배를 드리고 열한시에 각방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늦었고 또 하루 종일 앉아만 있었던 나는 룸메이트와 뜻이 맞아 수영장에서 몸을 좀 풀 생각으로 수영장을 찾아 나섰으나 수영장은 야외 풀이었고 물을 덥히지 않아 차가웠다. 집에서 같으면 그냥 해도 좋을 만 했지만 룸메이트가 겁을 내었고 나도 조심하는 차원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돌아오다가 로비에서 인솔자인 김 장로님 내외를 만났다. 이곳에서 사업을 크게 일구고 성공하여 잘 사신다는 친구 분이 함께 있었다.
그 분 말씀이 옛날엔  많던 한국 사람들이 지금은 칠십 프로는 떠나고 없다고 했다. 브라질이나, 한국, 또는 미국으로 길이 닿는 대로 떠났다 한다. 이곳의 이세 아이들은 스페니쉬는 물론이지만 한국말과 영어를 아주 잘 한단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어떻든지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 열심히 가르치고 아이들도 그렇게 알고 배운다했다. 이 나라에서는 교육도 부실할뿐 아니라  정부의 부패가 심해서 앞날의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 했다.

22일-
아침 8시에 기상하여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양창근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원주민 교회 Centro de Vida를 먼저 방문했다. 이십여 년 사역의 열매로 번듯한 교회건물과 신학교가 붙어있었다. 여기서 교회를 돌아보고나서 잠시 이 교회의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고 다른 원주민교회 한곳과  주말에만 하는 토요학교를 방문했다.
버스가 한대 겨우 지날만한 비포장도로로 어렵사리 다녀야했다. 토요학교에서는 마침 백 명 가까이의 어린이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나무 그늘 밑에 평상과 같은 식탁에 앉아서 접시에 담긴 큰 고기 덩이 하나와 쌀이 좀 들어있는 스프를 먹고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양일의 일 년 회비가 식비 포함하여 백 불 이라는데 돈이 없어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아이들 중에는 맨발인 아이도 더러 있었다.
열악한 환경의 일선에서 피부에 부딪치는 역경들을 사명감으로 감당하는 선교사들의 노고에 깊은 감명을 받고, 나약하고 안일한 우리의 모습에 양심이 찔리고 아팠다.

저녁에는 아순시온 한국학교 강당에서 교민 위안의 밤을 갖었다. 우리 일행 중 두 명이 깜빡 잊고 쌍 파울 호텔에 드레스를 그냥 걸어두고 왔기 때문에 논의 끝에 가운데는 검은색, 가장자리는 코랄색 드레스를 섞어 입었는데 오히려 더 보기 좋은 결과를 낳았다.
여기서는 더욱 진한 마음의 환대를 받고 천사의 음성이라는 칭송까지 받으니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한국적인 정서가 그리웠음을 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이 늦었지만 조별로 기도회를 갖고 헤어졌다.

양창근 목사님 교회

 교민 위안의 밤

 토요학교 점심시간 

주방 봉사자와 함께

람바레교회에서 찬양

2015년 6월 10일 수요일

Brazil 여행기 2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브라질 사람들의 자존심은 축구와 삼바와 예술에 있다한다. 특히 건축예술은 상당히 발달된 편이라 아름다운 건축물이 상당히 많았다. 이는 세계적인 명성의 건축가가 있기 때문이라 했다.
새 수도, 브라질리아를 그의 설계로 조성했다는데 지금은 칠순이 넘으신 분이라 했다. 그가 설계하여 지은 유명한 현대식 건물의 성당으로 갔다. 피라미드형의 높은 탑 모양으로 지은 건물은 긴 사다리꼴의 팔면체로 되어있었다. 네 면은 넓고 네 면은 좁은데 좁은 부분은 세로로 길게 스테인드 그라스로 돼있었다.
성당에 들어서니 광장만큼이나 넓은 성당에 사면으로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서부터 땅에까지 스테인드 그라스로 투영된 오색의 은은한 빛이 어두운 성당을 밝히고 있었다. 성당의 중심부에 좁은 천장은 십자모양으로 자연 채광이 되도록 설계되어있었다. 한눈에 모든 중심을 위로 향하여 까마득히 높은 천정의 밝은 십자가에 모아지도록 설계된 것이 메시지가 뚜렷이 드러난 훌륭한 작품으로 보였다.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 소집시간까지 한시간반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시차가 있어 여기는 네 시간이 빠르므로 잠자는 시간이 부족해서 피곤했다. 그러나 여행 첫날이라 나는  약간 들떠 있어서 방에 들어가 쉬지 않고 몇명의 동료들과 호텔 앞에 있는 큰 공원을 산책했다. 잘 손질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군데군데 조각품들도 있고 작은 연못도 있다. 키가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서 한낮인데도 서늘했다. 중국마켓이나 태국마켓, 또는 한국마켓에서도 본적이 있는 두리안이 높은 나무에 열러있는 것을 보았다. 먹어본 적은 없다. 구린내가 나지만 맛은 더할 수 없이 맛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높은 위치에 사람 머리통만한 크기로 달려있는 게 신기했다. 만일 모르고 지나다가 떨어지는 두리안에 맞으면 영락없이 죽을 수밖에 없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브라질에서는 쌍 파울에 한국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살고 있고, 쌍 파울 동양선교교회는 쌍 파울에서 제일 큰 교회다. 우리가 갖고 온 두벌의 드레스 중에 까만 드레스를 입고, 연습하기 위해 미리 도착했다. 넓고 큰 교회건물은 장식이 별로 없는 창고식의 건물이었다. 오늘은 수요예배로, 성도가 백 오십여 명이 모인 가운데서 우리가 찬양을 했다. 성가를 여섯 곡, 핸드벨, 가곡을 세곡, 고향의 봄의 순서로 진행 되었다. 고향의 봄을 부를 때에는 성도 중에 눈물을 닦는 사람이 많이 보였다. 우리들도 코끝이 찡 하고 가슴이 뭉클하고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순서를 끝내고 아홉시가 넘은 시각에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원래 브라질 식은 아홉시가 넘어서야 식당이 붐비기 시작한다고 한다. 낮이 뜨겁기 때문에 낮잠 자는 시간이 공식적으로 있고 저녁은 늦게 먹는 풍습이란다.
쌍 파울 교회의 어떤 장로님의 초대로 브라질 바베큐 식당에서 화려한 저녁을 푸짐하게 먹었다. 고기는 소, 돼지, 양, 닭의 고기를 부위별로 긴 쇠꼬치에 꿰어서 구은 것을 제복을 입은 종업원이 식탁을 돌면서 즉석에서 원하는 만큼 무제한 잘라주는데 기름이 없고 연했다. 야채는 보드랍고. 과일은 달고 향기로웠다. 낙농이 발달한 곳이라 후식이 모두 맛있고 훌륭했다. 모두 배를 두드리며 과히 먹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즐겼다. 그런데 밖에 나와서 보니 15.75 헤아스라는 간판이 보였다. 미국 돈으로 8불정도이다. 여기에 음료수와 후식은 따로 계산된다. 그래도 미국에 비하여 삼분의 일 가격인 것 같았다.

20일-
새벽 다섯 시 기상하여 호텔에서 든든히 아침식사를 하고(“아 파파야! 정말 맛있어!”) 버스로 비행장으로 떠났다. 대도시라서 출근시간은 혼잡했고 또 일방통행로가 많아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Rio de Janeiro (항공시간 한 시간 십분)에 도착하여 현지 가이드가 대기해 놓은 버스로 꼴꼬바도(예수동산)으로 갔다. 한쪽은 경사지고 다른 한쪽은 절벽으로 되어있는 높은 산 위에 십자형으로 팔을 벌린 거대한 예수의 상이 세워져 있었다.
이 산의 경사진 쪽으로 우리는 기차를 타고 삼십분 정도 S자로 구불구불 숲 속으로 올라갔다. 우거진 열대림을 지나면서 식물원이나 화원에서만 보던 트로피칼 플랜트들은 꽃도 크고 잎도 연하게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몇 개의 역을 거치면서 원주민으로 보이는 흑인들이 한둘씩 합류해가며 그들의 특유한 장단으로 원주민의 생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했다. 일행 중에 멋쟁이 수잔 언니가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며 모자를 들고 다녀서 꽤 많은 팁을 마련해 주었다. 우리는 대부분이 손자들이 있는 할머니들이다. 그럼에도 나이는 꽁꽁 묶어서 집에 두고 왔는지 수잔 언니의 익살스런 춤에 세상모르는 어린애들처럼 숨넘어가게 웃었다.
절벽 위에서 예수는 팔을 양쪽으로 벌리고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돌조각으로 모자이크 하여 쌓아올린 압도적으로 거대한 돌상이다. 받침대 부분은 십여 명이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작은 성당이다. 일 년에 한 번씩 이곳에서 미사를 드린다했다.
예수 석상은 너무 커서 카메라에 다 넣기가 힘들었다. 원래 이곳은 경치가 좋아서 힘 있는 자들의 환락을 위한 장소였었다고 한다. 캐토릭 국가인 브라질은 너무나 부도덕하고 마약과 환락에 빠진 이 도시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사방 어디에서도 잘 보이는 이 자리에 삼년에 걸쳐 예수상을 세웠다 한다. 실제로 밤이나 낮이나 도시 어디에서도 보이는 이 예수상이 서고부터 범죄율이 이십 퍼센트가 줄었다고 한다. 여기서 리오 데 자네이로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는데 사면팔방 어디를 보아도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다웠다

시내로 내려와 그 유명한 코파카바나 해변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해변에 나가 발이라도 담그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았으나 일정을 맞추려면 그럴 시간이 없었다.

빵지아쑤까로 갔다. 아쑤까는 설탕이란 말이고 보면 sugar bread 라는 말이다. 바다로 향하여 길게 나간 산 끝자락에 불란서 빵을 반으로 뚝 잘라서 세워놓은 것 같은 한 덩어리의 큰 돌산이었다. 이곳을 케이블카로 올라가는데 우선 산에 올라가서 다시 빵산 위로 올라가게 되어있다. 이 케이블카는 높기도 하고 길기도 했다.
저만치 서로 마주 보이는 꼴꼬바도(예수 상)에서와 같이 이곳에서도 항구가 내려다 보였다. 맑은 바다의 푸른 물빛과 들고나는 오밀 조밀한 흰 모래의 해안들, 우뚝우뚝 솟은 돌산, 푸른 숲과 어우러진 하얀 별장들, 안으로 들어온 만을 이어붙인 긴 다리, 숲이 우거진 작은 섬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져 참 아름다웠다. 세계 삼대 미항중의 하나라는 명성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쌍파울로 교회에서 찬양

성당


 꼴꼬바도에서 내려다본 리오의 전경

리오의 다른쪽 전경
 예수동산의 예수상

예수상의 받침대 안의 성당




2015년 6월 9일 화요일

Brazil 여행기 1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4월 18일 2006

오후 두시 오 분 Varig 항공사의 비행기로 출발하기위해 로스안젤레스 국제공항에 열한시까지 모였다. 합창단원 서른아홉 명에 이 여행에 동참하신 남편이 네 분, 합하여 마흔셋이다.
남미 선교 순회공연이라지만 단원 중에는 교인이 아닌 사람도 더러 있고, 선교 반 여행 반의 목적이다.
일주일 전부터 소소한 것들은 준비했고, 떠나기 전날 대강의 짐을 꾸려두었는데도 새벽 네 시에 잠이 깼다. 잠을 좀 자둬야 할 것 같아서 눈을 꼭 감고 뒤채는데 어렸을 때 소풍 가는날같아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섯 시가 조금 지나 일어났다. 세면도구까지 마저 다 챙겨서 가방을 싸고는 아침을 먹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시간이 세시간정도 남았다.
일정표에 보면 이과수에서 파라과이로 갈 때에 버스로 다섯 시간을 이동한다고 되어있었다. 짐작컨대 많이 지루할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좀 재미있는 것을 꺼내볼까 하는 마음으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데 평소에 잘도 눈에 띄더니 찾으려니까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옮길만한 것들을 찾기가 힘들었다. 결국 쓰레기만 눈이 팽팽 돌도록 헤치다가 얼마 안 되는 유머를 프린트해서 가방에 찔러 넣었다.
꼭 자기가 직접 데려다 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새벽에 나간 남편이 시간이 다 돼오는데 나타나질 않았다. “공경이 체증 돋운다나?” 풀 방구리 생쥐 드나들 듯 자꾸 문밖을 내다보는데 내게 약속한 시간에서 십 분쯤 늦게 남편이 나타났다. 그래도 고마운 마음에 나무라지 않고 짐을 싣고 떠났다. 그런데 이게 웬일? 후리웨이를 타자마자 막히는 게 아닌가? 조바심이 일었지만 남편이 미안해할 것 같아 잠자코 있다 보니 아무 이유도 없이 다시 뚫렸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또 막혔다.
“아무래두 늦겠다 그치?” 
“염려 마, 조금만 더 가면 카 풀 레인으로 가면 돼” 그런데 얼마쯤 가다보니 카 풀 레인까지도 막혀버렸다.
“이러다 비행기 못타는 거 아냐?”
“안가면 더 잘 됐지 뭐” 
원 세상에! 그렇게 같이 가지고 조를 때는 자기는 전혀 가고 싶지 않다고 시치미를 뚝 떼더니, 약 오르게 이런 때에 이렇게 속마음을 표현하다니!
결국 나는 속을 까맣게 태우고 삼십분 늦게 꼴찌에서 두 번째로 도착했다. 

공항은 무척 붐비고 복잡했고 오래 기다려서야 검표하고 짐을 부치고 나서, 합창단에서 준비해온 김밥을 공항 안 음식코너에서 먹었다. 줄의 끝에 있던 나는 시간이 없어서 선 밥을 겨우 면한 모래알 같은 김밥을 꾸역꾸역 물과 함께 넘기고 비행기를 탔다.
우리 일행은 비행기 뒷좌석에 몰려 있었다. 그 중에 내 좌석은 맨 뒤에 화장실 옆이다. 비행기가 떠나기 전부터 화장실냄새가 풍겨나왔다. 기내식은 좋았으나 음료수는 오렌지 쥬스와 도마도 쥬스, 콜라와 브라질산 소다수(과라나)로만 제한되고, 브라질 식 커피와 티가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Varig 항공사는 문제가 있어 파산 중에 있다고 했다.

19일-
비행시간 열세시간 반이 걸려서 새벽 다섯 시 사십 오 분에 브라질 쌍 파울에 도착했다. 여름이 막 지나고 가을이라는데 새벽인데도 여기보다 덥고 습기가 있었다. 이제부터 모든 일정을 함께할 박지웅 목사님을 만나서 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아침 출근시간이라 좀 시간이 걸렸다. 잘 구획되지 않은 도로 사정이나 관리가 소홀해 보이는 상점들이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상태를 한눈에 짐작케 했다.
여덟시가 지나서 Luz Plaza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아침부터 먹었다. 음식은 대체로 맛이 있었고 특히 파인애플과 파파야가 하와이에서처럼 맛이 있었다. 누군가가 변비에 좋다고 말하여 나도 파파야를 욕심껏 많이 먹었다. 여행 중엔 언제나 잠을 잘 못자고 또 변비로 고생하기 때문이다. 
박 목사님은 현지의 돈을 두둑이 준비해 와서 필요한 돈을 바꿔주었다. 남은 돈은 돌아갈 때에 다시 바꿔주겠다고 약속하여 나도 백 불을 바꿨다. 환율은 2.1대 1 이었으나 이백 헤아스로 계산되었다. 남편이 아무것도 사오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 했지만 그래도 쓸 일이 왜 없겠는가? 여덟 명의 조장이 된 나는 조원과 함께 쓰려고 전화 카드도 십 오불을 주고 하나 샀다.
점심시간에 다시 모일 때까지 시간이 좀 있었다. 우선 짐을 풀어 샤워하고, 오늘과 내일의 시간표를 살핀 다음, 집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카드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전화를 걸어본다. 절차가 복잡하여 여러 단계의 많은 번호를 눌러야 했다. 카드를 살 때에 들었던 사용법으로는 안돼서 호텔 측에 물어서 해 보는데도 잘 되지 않았다. 다이얼이 너무 늦었으니 다시 시도하라는 녹음이 자꾸 나왔다. 이 카드는 네 시간짜리인데 이상하게도 룸메이트의 전화번호로 걸면 세 시간 삼십분이 남았다 하고 내 전화번호로 하면 이십 칠 분이 남았다고 하면서 똑같은 녹음만 나왔다. 결국 변변히 쉬지도 못하고 전화도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의 국제통화번호를 후론트에서 잘못 가르쳐준 때문이었다.
쌍 파울 시내에 있는 한식집(해운대)에서 로스구이와 불고기,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로 점심을 먹었다. 구수하면서도 토속적인 맛이 일품인 된장찌개와 보드랍고 연푸른 상추가 특히 맛이 있었다. 점심 후에 시내관광을 하고 저녁에는 쌍 파울 동양선교교회에서 공연을 하게 되어있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중심부에 있는 시청과 역사적인 건물인 대 성당과 공원을 둘러보았다. 하얀 석조건물이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고 노점상과 약장수를 연상시키는 무리도 보였다. 여기서는 절대로 혼자 다녀서는 안 된다고 했다. 관광객 차림으로 카메라를 메고 있으면 달려들어 그냥 뺏어가는 무시무시한 사례도 있다고 했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다. 각 나라의 상사, 지사와 대사관들이 몰려있는 거리에는 독특한 아름다운 빌딩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건물이 페인트가 돼있지 않았다. 그냥 시멘트의 회색으로 돼있고, 오래된 것은 때가 끼어 검은 얼룩이 진 상태로 있어, 도시의 색이 대체로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건물을 그렇게 멋있게 지어놓고도 관리차원에서 경비가 들것을 고려하여 아예 처음부터 페인트를 하지 않는다 했다.
이월 중순부터는 한 달간을 삼바축제로 모든 행정이 마비된다 했다. 삼바축제장은 후리웨이 팔차선 정도의 포장된 통로를 사이에 두고 경기장 모양의 높은 스텐드가 창고 같은 삼층 건물과 함께 직선으로 까마득하게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해마다 주제를 발표하고 그에 따라 선발대회를 하는데 한 번에 한 팀의 인원이 사천 명이라 하니 그 규모가 짐작이 안가게 어마어마했다. 그러니 전국에서 몰려온 참가자의 인원만으로도 붐비고 복잡할 수밖에. 여기서 우리는 찬란하고 기괴한 갖가지의 삼바의상을 이불 또는 삼불을 주고 빌려서 입고 사진을 찍었다.
삼바의 나라인 브라질은 또한 축구의 나라이기도 하다. 축구장으로 가서 미국 할리우드에 있는 명성의 거리처럼 유명 축구선수의 발 모형을 찍어놓은 곳을 보았다. Ronaldo Luiz Nazario de Lima 라는 긴 이름과 함께 찍힌 호나우도 선수의 발모양도 보고 펠레 선수의 것도 보았다. R 이 처음 나올 때는 하 발음이 되고 L 은 우 발음이 되어 그렇다 했다.

축구장 앞에서

호나우도의 발모양

삼바 축제장에서 
의상들을 덧입고 무더위에도 함박웃음을

남국의 공주 같은 정미 길슨씨
삼바 축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