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 9일 금요일

닮고싶은 심성




2019년 8월 9일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에 실린 글입니다.




닮고 싶은 심성



   한 눈에 혹하고 반해버렸다. 놀라운 흥분에 사로잡혔지만, 눈 앞에 펼쳐진 위용은 마음을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히고 지그시 눌러준다. 그래도 터질듯 감당 못할 기쁨이 가슴에 가득 차올라 입을 벌리고 충격을 감당하느라 숨을 고르고 침을 삼켰다.


이렇게 높은 곳에 이리도 찬란한 아름다움이 이토록 장엄하게!

이렇게 넓은 가슴 속에 이리도 맑은 심성을 이토록 고운 빛갈로!

   길은 곧은길, Mt. Scott의 높이가 8,926피트니까 백두산처럼 높은 산인데 산을 오르는 경사감이 거의 없다. 그냥 평지의 숲을 뚝 잘라서 가운데 길을 내고 그 속을 달리는 기분이다. 온통 시야는 키 큰 전나무 숲으로 가려지고 정면에 좁은 역삼각형의 하늘만 빼꼼히 보인다. 숲속은 어두컴컴하다. 전화는 먹통. 물론 네비게이션도 불통. 그렇게 한 시간 반을 달렸다. 속세와 잠시라도 인연을 끊는데 꼭 필요한 거리인가보다.

   중간에 만나는 사람도 없어 미로를 헤메는 것이 아닌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몇 번을 돌아가야 하는가 하다가 숲이 끝나고 앞이 트였다. 조금 더 올라가자 전망대가 나왔다. 차에서 내려 언덕길을 약간 올라갔다.

   이런 장관은 처음이다! 이런 고운 색도 처음이다! 이렇게 큰 보석은 처음 봤다! 거대한 불루 사파이어의 호반은 흰눈을 이고 있는 설산의 침봉으로 운두를 둘러놓았다. 저만치 아래 수면은 깊이로 거리가 멀어 물결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거울처럼 눈산을 비치는 호수의 그림은 정지한 고체 위의 사진 같이 명징하다.

   불루 사파이어의 진한 푸른 색은 맞는데 이상하게 밝은 파랑의 고운 빛이 뿜어져나오는 묘한 색이다. 설산의 침봉도 한낮의 볕을 받아 흰 빛을 뿌려서 하늘로 떠오르는 듯하다. 이 시야에 가득찬 생동감 넘치는 푸른색과 흰색의 조화를 바라보는 나는 홀연히 넋을 빼앗기고 선경의 신비감에 푹 젖어 현실감을 잊어버렸다.

   크레이터 레이크의 명성은 대강 알고 갔지만 실제로 보니 그 경이로움은 정말 매혹적인 장관이었다. 이 호수는 화산폭발 후 분화구에 물이 고여 만들어진 칼데라 호수다. 그 넓이도 백두산 천지의 5.4배에 달한다니 대단하지만, 최고 수심이 594m에 달하는 북미대륙에서 제일 깊은 호수다.

   일반 호수의 경우 물이 맑아도 170피트 이상의 깊이엔 태양빛이 들어가지 못해 이끼가 살지 못하는데 크레이터 레이크의 경우는 700피트 깊이에도 이끼가 서식하여 학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한다.
   이 호수에는 다른 곳에서 물이 들어오지도 않고 나가지도 않는다. 오직 설산이 흘린 눈물만이 고인다. 적설량과 증발량이 비슷하여 일정한 수량은 유지되고 있다.
   이 호수의 가장 큰 특징은 무엇보다도 짙푸른 색깔에 있다. 불순물이 전혀 섞이지 않은 투명한 물이라 태양광선이 내려 쬐일 때 파장이 긴 붉은색이나 오렌지 색상은 먼저 흡수되고, 다음으로 노란색이 흡수되는데 파장이 짧은 푸른색은 흡수되지 않고 다시 수면 밖으로 반사되기 때문에 호수 전체가 남청의 짙은 쪽빛의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넋을 일시에 앗아버린다.
   호수를 둘러싼 산을 한바퀴 도는데, 6월 하순의 더운 날씨임에도 북쪽 면으로 가면 아직도 2m가 넘는 눈이 길가에 벽으로 쌓여있다. 그럼에도 이 호수는 겨울에 얼지 않는다고 한다.

   가슴 속 불기둥을 남김 없이 토해내고, 고산 침봉의 눈부신 설산으로 운두를 둘러 낮은 세상의 먼지와 바람을 막았다. 그리곤 티없이 맑고 맑은 심성으로 침잠. 빛을 끝모를 깊이로 받아들일 때, 고운 하늘빛 빨려 들어가 고이고 고여 짙어진 남청색. 준령의 높이만큼
, 호수의 깊이만큼,
 흔들림 없는 고요로 다져진 거대한 불루 사파이어. 그 넓은 가슴에 가득 담긴 결코 마르지 않는 풍요함, 얼어붙지도 않는 따스함.

   세상사에 마음이 어지러울 때, 수시로 떠올릴 보석같은 친구. 위기에 찾아볼 큰 스승. 불변의 확고한 신앙.
   
참으로 닮고 싶은 맑고 아름다운 큰 심성!  작은 내 마음에 가득 채우니 돌아오는 발걸음이 기쁨의 풍선에 매달린 듯 둥둥 뜨게 가벼웠다.


위저드 섬 (Wizard Island) : 크레이터 호반의 수면 위로 764피트 아있는 섬. 분화구 속에서 2차적인 용암의 분출로 생겨난 것인데 그 모양이 마치 ‘마귀할멈의 모자’와 같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 
크리트우드 코브 (Cleetwood Cove) : 림드라이브의 북쪽엔 호수 아래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트레일 코스가 있다. 크레이터 레이크는 경사가 심한 산비탈로, 이곳을 제외하고는 다른 어느 지점에서나 물가로 내려가는 일이 금지되어 있다. 선착장으로 내려가기 전에 주차장에서 보트투어의 시간표를 확인하고 표를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약 1마일 가량의 길은 절벽에 가까운 가파른 경사면에 있어서 다시 올라올 때 시 힘이 들어 자신이 없으면 내려가지 말아야 한다. 선착장에선 호수를 돌아보는 보트투어는 약 2시간. 이 호수에서만 수 있는 독특한 경을 기며 고요하리만큼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왕복 2마일이 넘는 거리의 트레일 코스를 오르내리고 보트투어까지 하려면 5시간의 시간여유를 가지고 계획하는 것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