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5월 27일 월요일

일소행日少幸




2019년 5월 31일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란에 실린 글입니다.




   무심한 사이에 엄청난 손해를 본다면? 거기다 그렇게 상당한 손해를 본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면?
   일소행日少幸이 그렇다. 우리가 커다란 행복에 초점을 맞추고 바삐 지나는 사이에 자칫 일상의 소소한 행복들은 우리 곁을 무심히 지나가버린다.
   보통 우리가 아프지 않고 인생 80년을 산다면 ‘26년을 잠자고, 21년은  일하고, 9년을 먹고 마시지만, 웃는 시간은 겨우 20. 그에 비해 화내는데는 5, 기다림에 3년을 소비한다.’  계산을 본 일이 있다요즘 수명이 늘어 백세 시대가 되었지만 더 오래 산다고 쳐도 자고 일하고 먹는 일이야 비례하여 늘어나겠지만 웃고 행복한 시간은 크게 늘어나기는 힘들다고 생각된다.
   이 계산대로라면 인생이 너무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열심히 힘겹게 살아왔는데그럼 앞으로의 삶도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결국은 웃고 행복한 시간은 고작 일생중에20일이라니!
   앞으로는 마음가짐을 고쳐서 밝은 눈으로 내 삶의 일소행들을 낱낱이 주워담아보기로 했다. 일소행은 마음 먹기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난 이런 보석같이 반짝이는 순간들이 우리 주위에 널린 것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만지지 못하고, 맛보지 못하면서 지나쳐버리고 무심히 지내온 것을 후회한다.

   천성으로 게으른 내게 자명종은 얼마나 고맙고 귀여운지! 이십여년 내 머리맡을 지키는 손 안에 들어갈 만한 작은 세이코 시계. 남편이 일본 출장가서 사온 건데 귀뚜라미 소리로 정겹게 나를 깨운다. “고맙다 시계야!”말하면서 자명종을 껐다.  밤새 피곤과 씨름한 몸에 갈증을 적시는 생수 한 컵은 또 얼마나 시원한가!“아 시원하다!”말하고 씽긋 한번 웃었다.
   창문을 열고 숨을 깊게 들여쉰다.담장의 핑크 재스민의 꽃향과 레몬나무의 수향과 풀내음 섞인 아침 공기가 달고 신선하다. 깊이 들여마시고 잠깐 미소를 지었다. 밤에는 잠자던 도시의 소음도 활기차다. 맑은 물 콸콸 쏟아지는 상수도, 구정물 쑥쑥 빠지는 하수도도 마냥 고맙다! 거울을 보고 씽긋 웃어본다. 하루 종일 그렇게 웃으리라. 아침 인사 건네는 목소리들 정겹다! 시장끼 달래는 소찬도 달다. “아 감사해!” 내가 웃으니 모두가 나를 따라 웃는다. 하늘도 구름도, 나뭇잎도 풀잎도, 꽃은 물론 내 눈길이 머무는 빛을 받은 모든 사물이 나를 따라 반짝이며 웃는다.
   지금 우리는 예전엔 임금이나 황제라도 누리지 못했을 큰 복을 일상으로 누리고 사는 게 한 두가지가 아니다. 음식만 해도 사철을 안 가리고 지구촌 각 나라 음식과 과일을 다 섭렵하며 즐기고 산다. 문명의 이기로 누리는 편리함은 또 어떤가? 말로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왜 우리는 바라는 것들이 여전히 많고, 불만이 쌓이고, 불안해하면서 그에 눌려 사는지
   커다란 상자를 하나 준비해두고 소원들을 넣어두기로 했다. 큰 소원은 기도칸에 넣고, 먼 후일은 계획칸에 넣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때때로 솟구치는 분노는 믿음칸에 넣어두기로 했다. 내힘으로 되는 것은 물론 내가 힘써 하지만 안 되는 것들은 이 상자에 넣어두고 시간이 무르익고 맛이 숙성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지금은 그저 오늘의 일소행들을 열심히 주워담으며 히쭉 헤쭉 웃으며 살리라. 옛날에는 임금님만 서빙고에서 가져다 먹던 어름이다. 이 더운 여름에 집안에 서빙고를 두 개나 들여놓고 손만 뻗으면 시원함을 맛 볼 수 있다. 발품을 팔지 않고도 아이패드로 지구촌 구석구석을 편안한 자세로 앉아 여행한다. 한국의 형제를 화상통화로 대화하고 영국 황실의 결혼식을 초대받은 것 보다 더 편히 구경한다. 주어진 복도 일일히 다 챙길 수 없이 많은 세상이다.
   인류 역사 이래 이렇게 큰 복을 누리는 세대가 있었던가? 먼데 행복만을 바라며 안달하지 않기로 했다. 눈길을 돌려 이미 손 안에 들어있는 행복들을 온전히 누려야겠다.

   일소행들을 무심한 사이에 놓쳐버리지 말고 거두어 꼭꼭 곱씹어 맛 보며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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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5월 9일 목요일

비익 연리 比翼連理




이글은 미주 중앙일보  5월 9일자 '이 아침에'란에 '비익연리 比翼連理 해로동혈偕老同穴'이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비익 연리는 백거이白居易 장한가長恨歌에 나오는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의  사랑 이야기에서 비롯됐다.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는 사랑의 극치를 이르는 뜻이 있다.

   비익조는 본 사람이 없는 상상의 새지만 연리지는 숲이 우거진 곳에서는 가끔씩 발견되는 나무다. 뿌리가 다른 두 나무가 둥치나 가지가 붙어서 상통하는 한 나무가 되었다. 두 나무의 특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두 나무이면서 또한 생살을 찢고 피를 흘리기 전에는 가를 수 없는 한 나무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한 나무인데 한쪽에서는 붉은 꽃을 다른 쪽에서는 흰 꽃을 피우기도 한다. 연리지가 되면 물론 각각의 한 나무일 때 보다는 상호보완으로 생장력도 더 강해진다.
   연리지는 사랑 이야기지만 아무리 영혼을 불태우는 아름다운 사랑이라도 불꽃이 순간에 그친다면 이에 미치지 못한다. 세월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섣불리 대적할 수 없는 절대적인 명제를 뛰어넘어야 한다. 그래서 보통은 금슬이 좋은 장년이상의 부부를 뜻한다.
   부부의 금슬이 좋은 뜻으로는 해로동혈偕老同穴이라는 말도 있다. 살아서는 함께 늙고 죽어서는 한 무덤에 묻힌다는 말이다. 아마도 평범한 보통사람들에게는 누구나 부러워할 이생의 최고의 아름다움이라 말해도 좋으리라.

   언젠가 티브이에서 낱말 알아마추기 게임을 봤다. 노부부가 짝을 지어서 한 사람이 주어진 낱말을 설명하면 짝이 된 사람이 맞추는 게임을 했다. 할머니가 알아맞추어야 할 낱말은 천생연분이었다.  퀴즈를 받아든 할아버지는 잠시 난색을 표하더니 이리 저리 몇 번 설명을 했지만 할머니가 알아맞추지 못하자 그거. ? 우리 같은 거 있잖아 그걸 뭐라고 하냐구?” 할머니는 알았다는 듯 눈을 반짝이며 웬수라고 대답했다. 방청석이나 진행자가 넘어갈 듯 웃어젖혔다. 할아버지는 난감한 표정을 거두고 아니 그런거 말고 우리처럼 오래 오래 네자로 된거 있잖아?” 곧바로 나온 할머니의 총알 대답은 모두를 눈물까지 흘리며 웃게 만들었다. 할머니의 대답은 평생 웬수였다.
   이분들의 결혼은 금혼식을 훌쩍 넘겼고 앞으로의 삶이 십년은 몰라도 이십년은 확신할 수 없을 듯 했다. 누구라도 이분들이 해로동혈 할 분들이라 생각할 만 했는데 이건 또 무슨 앞뒤가 맞지 않는 이율배반의 말일까?  진행자나 방청석의 대다수, 아니 시청자의 대다수가 이 촌철살인의 코미디로 허리를 꺾고 눈물을 훔치며 웃었을 그 속내는 무엇이었을까? 다소간에 차이는 있겠지만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지 않았을까?

   암수가 한 쪽 눈과 한 쪽 날개만 있다는 비익조는 함께 날아야만 비상할 수 있다. 완벽한 공조를 이루지 않으면 날다가도 떨어질 운명이다. 새가 날지 않으면 먹이도 찾을 수 없으니 혼자서는 생명조차 이어갈 수 없다. 절체절명으로 상대가 필요하고 호흡을 같이해야 하는 관계다.
  두 눈을 다 뜨고 보이는대로 다 보고 두 팔을 마구 휘두르며 평생 웬수를 외칠 일이 아니라고 본다. 때론 한 눈을 감고 한 팔을 접을 일이다. 비익조는 사랑의 극치로, 한 눈을 감고 한 팔을 접고, 숨결조차 같이하는 완벽한 합일을 이룰 때에, 결국 하늘을 날 수 있다는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짧은 인생길이다. 천생 연분으로 해로동혈할 사이를 평생 웬수라 부르며 길지 않을 남은 날들을 허비할 일일까? 연못이 가슴 가득히 안고 있는 진흙탕에서 연꽃을 피워올리듯 비익 연리로 천상의 열락을 누릴 홍복을 만들어보는 일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