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램프 스탠드를 재활용 화분으로


셋째 손자를 보면서 아들네와  합쳤던 살림을 막내가 다섯살이 넘어서 다시 나누었다.
새집에서는 필요 없어 버리려던 램프스탠드를 슬쩍 갈무렸다가 가져왔다.스탠드의 받침이 무쇠 주물로 무거워서 바람도 타지 않고스테인드 그라스로 된 쉐이드도 예뻐서 화분을 만들고 싶었다.
먼저 전구를 빼내고, 전선을 뽑아내고, 모두를 분해했다. 
삼단으로 되어있는 길이를 
일단, 이단으로  줄여서 다시 조립했다.


쉐이드와 폴대 사이에서 물이 새지 않도록 
안에 비닐봉지를 잘라서 깔아 물이 폴대 안으로 흐르도록하고
흙을 채웠다. 

이 식물은 가늘고 긴 꽃대가 나와서
끝 부분에 자잘한 꽃을 피우고는 
그 자리에서 잎과 뿌리가 생기면서 포기를 형성한다. 
거기서 또 꽃대가 자라나와  다시 포기를 형성하면서 
이단 삼단으로 늘어진다.
생장력이 좋아서 흙과 물이 풍부하면 잘 번지고 번창한다.

이 식물은 그라운드 커버로 사용하는 식물인데 
잎이 자잘하고 반짝이면서넝쿨처럼 길게 자라니까 
밑으로 늘어지면서 자라 운치를 더할 것이다.

이것은 쉐이드가 못쓰게 되었다.
폴대를 아주 없애고
키를 낮추고 화분받침으로 쓰던 접시를
접착제로 붙여서
펠리칸 두마리를 얹어놓았다.

이렇게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재활용품, 아니 작품들은
유별한 애착이 가고
볼 때마다 마음에 뿌듯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누가 보고 칭찬이라도 해주면 기쁨은 배가된다.

2019년 11월 7일 목요일

삶의 균형





2019년 11월 11일자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란에 '균형 있는 삶을 사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삶의 균형


   균형, 발란스! 참 아름다운 말이다. 우리는 훌륭한 예술작품 속에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조화된  균형을 볼 때에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한다.  균형이 깨지면 아름다움도 망가진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삶의 균형이 깨지면 불안해지고 행복은 그 찬란한 빛을 잃어버린다.

   둘째 손자가 카타리나 섬에 다녀 오는 날, 집에 들어오면서 검지를 치켜들고 우는 시늉을 했다. “아우 아퍼! 독수리가 내 손가락을 물었어요!” 고추세운 검지 손가락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가 부리를 박고 손가락 끝에 얹혀있다.
   기념품으로 사온 이 독수리는 무게 중심이 부리 끝에 모여있다. 독수리의 외양으로 보면 부리는 제일 앞쪽이고 몸체는 뒤에 있어서 부리 끝에 무게 중심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완벽한 무게 중심을 부리 끝에 두고 뾰족한 위에 오뚝 균형을 잡고 선 독수리의 묘기가 신기하게 보여 호기심이 발동하고 재미있었다.

   우리는 어쩌면 걸음마를 배우기 이전부터 애써서 균형감각을 키워간다.  외줄을 타며, 평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떨어져내릴 위험을 안고 비틀거려야 하는 광대처럼, 위험천만한 곡예를 멈출 수 없이 감내하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
   삶에서의 균형은 물리적인 평형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데에 있다. 개인적인 기호와 의무를 사회적인 인종, 문화, 관습,  종교, 철학의 관념에 어떻게 안배하고 접목하는지에 따라서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이루어간다.
  체력은 팔과 다리의 길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하루는 24시간으로 제한되어있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쓸지, 내게 허용된 물질은 어디에 어떻게 소비할지, 인간관계는 어떻게 형성해갈지. 순간 순간의 선택은 이어지고 합쳐져서 인생을 직조해낸다.  일차원도 아니고 이차원도 아니고 삼차원도 아닌 다차원의 복합적인 영향을 분별하여 선택해야 한다.
   올바른 선택은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른 선택은 방향을 비뚤어지게 하는 요인이 된다. 허나 심사숙고할 충분한 시간의 여유가 없음에도 우리는 순간 순간 숨차게 밀려오는 선택의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때로 우리가 절치부심 골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도 모를 일이 종종 생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진퇴양난에서 끙끙대지만 시간은  동정심이란 눈꼽만큼도 없이 매정하다. 기다려주지 않고 달려가버린다.
   삶의 균형은 평형이 잘 잡혀야 하지만 평형은 평등하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학적으로 균일하고 균등하다고 되는것도 아니다. 보고 느끼기에는 크고 무거운 일이 실제로 작고 가벼운 일에 중요성과 가치를 양보해야할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다양한 색갈과 크기와 비중이 어우러져서 대비와 대칭, 보완으로 잘 조화를 이룰 때에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우선과 차선의 순위가 분명해야한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싶은 것, 내가 싫지만 꼭 해야하는 것을 두고 면밀히 저울질 해서 선택하고 실행해야 한다.
   개인 삶의 균형이 깨지면 가정의 틀이 보루가 되어야 한다. 개인의 삶에 균형이 너무 크게 깨져서 그 파급이 가정의 보루를 넘어서면 사회가 보루가 되어야한다.  법과 제도가 필요한 이유다. 사회의 균형이 깨진 물결이 너무 거세면 나라까지 흔들리게 된다. 이에 균형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 절감하게 된다.
   균형은 잘 잡아놓아도 세파와 풍파에 곧 밀리고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을 재간은 없어도 균형이 아주 깨져버리는 불행을 맞지 않으려면 개인에게는 가치관의 확립이, 사회에는 건전한 제도가, 국가에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이 요구된다.

   둘째 손자가 카타리나에서 사온 독수리 미니어쳐를 나무 젓가락 끝에 얹어보았다. 10도 쯤의 기울기로 이쪽 저쪽 기우뚱거리며 빙그르르 돌다가 오똑 멈춰섰다. 날개를 활짝 편 모양이라 마치 나르는 듯,  뾰족한 끝에 얹힌 모양새가 다시 봐도 신기했다.
  때로 큰 국난이나 사회적인 불안상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불굴의 역경을 딛고 두각을 나타내는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이 나타날 때가 있다. 이런 위인들은 벼랑 끝에 서있을수록 밤하늘의 별처럼 길이 빛난다.  이들의 선견지명은 어쩌면 확고한 가치관의 정수를 한 눈에 알아보는 비범한 투시 역량이 있고, 이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거침 없이 희생할 수 있는 결단력과 실행 능력이 있었던 결과이리라.

   나같은 범인은 개인 삶의 균형, 좀 더 나아가서 가정의 균형만 잘 잡아나가도 성공한 인생이다. 가정안에서만 해도 사랑과 존중, 격려와 타협, 책무의 분담, 비전의 공유를 잘 조화시켜 매끄럽게 꾸려나가는 일만도 벅찬 일이다.
   균형잡힌 가정에서 뿌려진 씨앗들이 대를 거르는 동안, 누가 알랴? 인류에 보탬이 되는 거목이 생성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