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4일 토요일

Brazil 여행기 5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깜깜하게 해가 져서야 이과수 Rafain Hotel에 도착했다. 객실이 여섯이나 여덟 개씩 붙어있는 이층건물이 널따란 잔디에 띄엄띄엄 늘어서 있었다. 분수대 앞 잔디에서 밝게 빛나는 남십자성을 바라보며 피자를 주문해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남미 여러 나라의 민속춤을 보러가려면 시간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과수 폭포의 명성으로 워낙 관광객이 많은 곳이라 쇼를 하는 장소가  엄청나게 컸다. 남국의 미남 미녀들이 원색의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와서  정열적인 선율에 열정적인 춤을 추는 것을 관람했다.

25일-
6시 30분 기상하여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상냥한 이과수의 가이드와 함께 버스로 알젠틴 국경을 넘어 이과수폭포를 보러갔다. 일명 악마의 목구명이라는 이 거대한 폭포를 보기 위해 강의 지류를 열개를 건너는 이어붙인 긴 다리를 건너던 중 일 미터는 됨직한 이구아나를 보았다. 물위로 들어난 바위에 엎디어 사람들의 눈총을 개의치 않고 졸고 있었다.
물은 깊지 않았으나 이십분이나 걸려서 건너온 넓은 강폭의 물이 우묵하고 둥그런 절벽으로 몰아 떨어져 내렸다. 폭포 주위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걷는데 거기서 솟아오르는 물보라로 우리는 온통 젖었고, 우뢰 같은 물소리로 귀가 멍멍해졌다. 구름사이로 숨바꼭질하는 강한 해를 따라 선명하고 고운 무지개가 여기저기 생겨났다.
다리를 다시 건너와서 오솔길을 따라 폭포 아래로 내려온 우리는 구명조끼를 입고 보트를 탔다. 보트는 우리를 태우고 폭포 가까이 다가가서 두 번이나 물보라 속으로 들어갔다가 돌아 나왔고 우리는 속옷까지 몽땅 젖었다.
첫 번째는 두려움에 움츠리고 눈을 감았으나 두 번째는 어차피 젖는다는 생각에 흠씬 즐겨보리라 마음먹고 소리를 지르며 눈을 뜨고 물을 맞으니 아주 재미있었다.
보트를 타고 하류로 삼십분 내려와서 앞뒤가 구분이 안되는 특이하게 생긴 트럭을 타고 열대 숲을 지나오며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성장이 빠른 굵은 대나무의 마디는 이십 인치도 넘을 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이과수 장로교회로 갔다. 정규모임이 있는 날이 아니라 그런지 현지인들이 좌석의 반쯤을 채웠고, 한인들은 많이 오지 않아서 섭섭했다. 어디에서나 누구든지 화려한 의상과 아름다운 선율의 하와이안 댄스에는 열광하는 모습을 보였다.

26일-
오늘은 이과수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새벽 5시 30분에 기상하여 가방을 꾸리고 check out. 브라질 폭포를 관광했다. 이과수 폭포의 메인폭포가 되는 악마의 목구멍은 지리적으로는 알젠틴에 있다. 그런데 알젠틴에서 수평으로 내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브라질 쪽에서 병풍을 바라보듯 입체적으로 감상하는 광경은 입을 다물 수 없도록 장관이었다.
폭포는 몇 마일에 걸쳐 있어서 폭포를 따라가며 계곡을 사이에 두고 숨바꼭질하며 오솔길을 걷노라면 수없는 폭포가 새로운 그림으로 다가왔다. 넓고 큰 폭포도 있고 가늘고 아기자기한 것도 많았다. 한 번에 떨어지기보다 지층의 단계를 이루어 이층 삼층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제 폭포를 다 구경 했나?라고 생각하면 모퉁이를 돌아가면 더 큰 규모의 폭포가 나와서 보는 사람을 새록 새록 감격하게 했다.
점심 후에 새 공원으로 갔다. 여러 종류의 열대지방 새들이 알록달록 원색으로 예쁜데 너무 커서 귀여운 맛이 적고 좀 무섭기까지 했다. 상냥하던 이과수의 미녀 가이사를 작별하고 3시 30분 발 비행기로 쌍 파울로 향했다. 많은 정보를 갖고 성심껏 설명하는 가이드를 우리는 의사, 변호사와 같이 가이사로 부르기로 했었다.
이과수 비행장에서 우리는 쌍파울로 가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지만 짐은 직접 로스앤젤레스로 부친다고 했다. 우리의 모든 짐을 부치는데 시간이 참 오래 걸렸다.
잠자리를 바꾸면 잠을 잘 못자는 나는 떠나기 전날부터 잠을 설쳐서 피곤했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나는 깜빡 졸았다. 눈을 뜨니 허전한 느낌이 확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늘 목에 걸고 다니던 주머니가 없다. 의자 밑에 떨어뜨렸나? 엎드려 찾아보니 없다. 캐비닛에 올려놓았던 짐을 꺼내어 찾아봐도 없다. 비행기는 이미 떠서 날고 있고, 눈앞이 캄캄했다. 거기에는 면허증과 크레딧 카드, 썬 그래스, 카메라, 현금 사백불이 들어있었다.
할 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며 모든 일정을 주관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된 박 목사님에게 말씀드렸다. 쌍 파울 공항에 내려서 이리 저리로 박 목사님을 졸졸 따라다니며 분실신고를 하고 기다렸다. 우리 모두는 거의 찾을 수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내 가방이 이과수 공항, 스크린 체크하는 곳에서 발견 된 것이 전화로 확인되었다. 쌍파울 공항에서 엘에이 비행기를 타려면 우리는 여섯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항공편이 없어 당일 찾을 수는 없었다. 면목 없지만 박 목사님께 부탁을 드릴밖에. 다행히 감사하게도 오월 일일에 LA.에 오시는 오 목사님 편으로 전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쌍파울 공항에 누군가가 “아! 이제 또 밥 안 해먹는 곳, 어디 갈 데 없을까?”라고 말하여 모두가 까르르 웃었다.

27일-
평소에 소소한 일들을 자주 잊는 나는 스스로 은근히 걱정하던 차에 이번일로 마음이 내려앉듯 무거웠다. 점점 무능력자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쌍 파울에서 밤 열두시에 출발하여 (비행시간 열 세시간) 다음날 아침 여덟시 십오 분에 로스안젤레스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남편은 나에게 얼굴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동안 볕에 타기도 했고, 또 피곤하기도 했고, 화장도 지워졌으니까 그럴 테지만 나는 야단맞을 일을 대비하여 엄살을 부렸다. “반쯤 죽었다 살아서 그래”라고 말하고 분실사고의 자초지종을 얘기 했더니 살아서 돌아온 것만 고맙고 좋단다.

눈을 감으니 꾀죄죄한 파라과이 원주민 어린이들의 커다란 눈망울이 떠오른다. 철저한 무관심과 소외 속에서 소망 없이 살아가야 할 저들에게 다가가, 사랑을 베풀고, 소망을 안겨주려고 눈물을 바치는 해맑은 젊은 선교사의 얼굴도 보인다. ‘어린이여 일어나라!’ ‘젊은이여 일어나라!’ 고 외치는 함성이 남쪽에서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            060501

 악마의 목구멍


 흠뻑 젖어서도 밝은 웃음들을




 엉덩이 말리기










 이과수 장로교회에서

 누구나 좋아하는 하와이안 댄스

           폭포를 뒤로하고



2015년 7월 1일 수요일

Brazil 여행기 4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23일-
오늘은 조동진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아순시온 장로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어있다. 오늘 그 교회의 기도원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여 버스로 한 시간을 달려서 시온기도원에 도착했다. 예배 중간에 평복차림으로 우리가 성곡을 네곡 불렀다. 교인이 성인만 백여 명이 되었다.
기도원은 이십 에이커가 넘는다 했다. 성전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남녀 숙소가 길게 이어져 있고, 식당과 친교실 외에 부속건물이 몇 개 더 있었다. 나무숲이 있는 구릉 뒤로 묘지까지 딸려있다고 했다.
파라과이에 한국 사람들이 많았을 때엔 교회도 부흥하여 이렇게 큰 기도원을 마련하고 활발히 신앙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사업에 크게 성공하여 쉽게 사업을 거두지 못할 형편이거나, 아주 가난하여 길이 없는 사람들만 남아있고, 중간층의 사람들은 브라질, 한국, 캐나다,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예배후 교인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 예배를 위해 어제의 반대색으로 드레스를 입고 양창근 목사님이 섬기시는 람바레 현지인 교회로 갔다. 작년에 있었던 교통사고의 참사로 인한 분쟁으로 항의 시위가 정문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했다.
우리는 버스를 뒷마당에 대고 뒷문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는데, 앞쪽에서 무슨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무겁고 낯선 곳에서 느끼는 약간의 공포심도 생겼다.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집회가 시작되자 그들의 뜨거운 찬송과 열정적인 메시지는 민족성과 선교지라는 의식을 더욱 치열하게 느끼게 했다. 우리는 성가 여섯 곡과 핸드벨, 가곡 한곡, 그리고 하와이안 댄스로 끝마무리를 했다. 후에 양창근 목사의 사모님이 초대하는 숯불구이로 마음이 편치 않을 만큼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우리는 보답으로 식사 후에 반주 없이 즉석에서 ‘오빠생각, 낮에 나온 반달, 고향의 봄’을 함께 불러드렸다.

24일-
새벽 다섯 시 반에 기상하여 짐을 꾸리고 아침을 든든히 먹고 다시 버스로 이과수로 출발했다. 여섯 시간을 가야 할 참이다. 파라과이에서는 제일 좋은 호텔이어서 힐러리 여사도 묵고 갔다는 좋은 곳을 우리는 별로 즐길 새 없이 떠나는 아쉬움이 조금 있었다.
쌍 파울에서 속을 썩이던 전화카드는 여기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는 컴퓨터실이 그냥 오픈 돼있어서 자유로 이 메일을 집으로 보낼 수 있었다. 쌍 파울에서는 통화는 못했는데도 호텔을 나오면서 통화료를 십 일불을 주어야 했다. 국제통화를 시도하면 연결이 안 되어도 로컬통화요금은 시도할 때마다 부과된다고 했다. 어처구니 없지만 말도 안통하고 내 기분과 시간만 아까우니 그냥 줘버렸다.
파라과이는 인구의 칠십 펴센트가 여자라 했다. 그런데도 젊은 남자는 자꾸 다른 나라로 빠져나간다했다. 교육이 부실하고 직업이 없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남자가 아주 귀하여 모든 노동을 여자들이 하고 남아있는 남자들은 그냥 놀고먹는 천국이란다. 자원은 많으나 위정자들은 부정부패로 물들어 있고 산업이 없으니 일자리도 없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라고 했다. 그러니 가난을 면할 길이 점점 더 없어보였다.

어제 갔었던 교회의 양창근 목사님은 이십여 년 전부터 원주민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었다. 작년에는 'Ariba Ninos(어린이여 일어나라)' 라는 주제로 전국적인 선교대회를 열었다. 양 목사님이 가르쳐서 선교지로 나간 선교사들의 각 지역 어린이들 팔천 명을 초대하여 대회를 치뤘다고 하니 그 사역의 열매가 얼마나 방대한지 알만 했다.
정부의 무관심속에 버려져있는 어린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앞날의 소망을 심어주는 일들을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여행할 때는 잘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기도 했지만 파파야가 달고 향기롭다고, 커피가 진하고 맛있다고, 복숭아 주스가 신선하다고, 욕심껏 먹었으니 뻔하지 않은가. 근데 문제는 도중에 들를만한 화장실이 없는 거다. 있어도 여러 사람이 볼일을 다 보려면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옷을 화장실 안에서 단정히 입고 나왔다가는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혼쭐이 났다. 남자 화장실도 금새 여성전용으로 바뀌고, 어쩔수 없이 목사님은 남자 화장실 앞의 보초임무를 마다하실 수 없게 되었다.

파라과이 한국학교 강당에서다. 연주하는 도중에 며칠을 애 먹이던 소식이 갑자기 왔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연주를 끝내고, 화장실을 찾아서 어둠 속에 치렁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달음질을 치는데 하필 그곳은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건너서야 화장실이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겨우 급한 고비를 넘기고 보니 종이가 없는 거다. 대책 없이 멍하고 있는데 때마침 구세주가 나타났다. 혼자서도 넉넉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사이좋게 알뜰하게 처리했다. 그런데 나와 보니 수도는 있는데 물도 안 나왔다.

 나중에 이 가방을 잊어 버렸음

 강변의 빈민가와  붉은 흙

시온 기도원

 민속 공연

 민속공연 

노변의 묘지
묘석을 작은 집모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