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 14일 수요일

수선화와 봄맛

이 글은 2018년 3월 10일자 중앙일보 '이 아침에' 난에 '추억이 싹트는 봄날'이란 제목으로 실렸던 글입니다.





   어머! 제 이렇게 자라올라 꽃을 피웠지? 며칠 따뜻하더니 변덕스레 찬 바람이 불고 추워졌었다. 며칠동안 밖을 내다보지 않다가 오늘 보니 어느새 한 이나 자란 수선화가 청초한 노란 꽃을 짝 피우고는 다소곳이 봄을 안고 웃고 있다.
   각 나라의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엘에이는 음식도 다양해서 동 서양 육대주의 과일과 음식이 철을 가리지 않고 거의 다 있어 입맛대로 나라별로 돌아가며 찾아 먹을 수 있다. 그럼에도 이상한 것은 젊은 날에 뇌리에 각인된 보잘것 없을 것 같은 고향의 옛 음식들은 늘 그리움의 대상이다. 
   오래 전 일이지만 한국에 살 때는 긴 겨울을 대비하려면 먹거리 준비가 상당했다. 김장을 담그면 기본적으로 포기김치, 막김치, 김치, 깍두기, 동치미외에도 보쌈김치, 갓김치, 종류별로 열심히도 담갔다. 마른 나물들도 무말랭이 호박 고자리, 가지, 고춧잎, 시래기를 고루 갖추어 마련해 두었었다. 초여름부터 장만한 마늘종, 깻잎, 부추, 풋고추, 무우, 오이, 등을 장과 갈에 장아찌를 담가서 때마다 다양한 부식을 내 먹으며 겨울을 났었다. 살림을 제대로 하는 주부라면 이런 정도는 어느 집이나 기본으로 다 갖추어두고 먹었다.
   지금 이것을 이렇게 열거하다보니 내가 그렇게 하던 장본인인데도 엄청나서 어떻게 그렇게 했을까 기가 찰 정도로 멀고 까마득한 얘기로 느껴진다.
     이국, 나물, 두릅나물, 달래 된장찌개, 미나리 강회도, 긴 겨울을 지나고, 계절을 건너뛰어 먹어야 제 맛이 나는가보다. 날을 생각하며 마켓에서 눈에 는 대로 사다가 먹어보지만 추억 속의 그 맛과 향기를 그대로 살리기는 한참 어렵다.
   그래도 마당 한 편에 연하게 자란 부추를 한 어 오이 소박이 속을 박고, 간 생고추를 설킁 갈아서 풋배추 김치를 담갔다. 풋김치가 맛이 들면, 땅에 러두었던 파뿌리가 가늘고 길게 자랐으니, 아다가 물리어 강회를 만들고 초고추장도 들여 봄맛을 살려봐야겠다.

280세대가 사는 이 시니어 단지에 한국 사람이 여섯 세대가 산다. 두 집은 아직 직장에 다니고 연세가 더 드신 세 집은 완전히 은퇴했다. 모두 일찍 미국에 와서 피나게 노력하여 전문직이나 사업으로 성공하고, 일면 조국의 번영에도 일조하고, 유복한 노년을 보내는 분들이다.
질곡의 수난을 겪은 조국의 매듭 많은 근세사. 참담한 망국과 혹독한 식민지, 혼란의 해방, 건국과 비참했던 육이오 전쟁, 그 이후의 분단과 냉전의 세월만 해도 지난했던 세월. 그 각박한 토양에서도 거칠 것 없는 푸른 꿈을 가슴 깊이 간직한 채 혹독한 추위를 이기고 험난한 고산 준령을 넘어오신 어른들이다.
‘봄 처녀 제 오시네 새 풀 옷을 입으셨네’로 시작하여 2절의 ‘미안코 어리석은 양 나가 물어볼까나’로 끝맺는 학창시절에 불렀던 이은상 작시 현제명 작곡의 ‘봄처녀’. 이 시와 곡은 여기 은퇴 마을에 사시는 분들이면 누구나 참 오랫만이긴 하겠지만 서두만 떼면 입에서 술술 이어나오는 가사와 곡일테다. 이 곡을 김동명 작시 김동진 작곡의 ‘수선화’와 함께 준비해두어야겠다.
낮에 집에 계신 분들을 불러다가 이곡을 들으면서 부칠 곳 없는 정열을 가슴에 깊이 감추고 찬바람과 추위를 이기고 제일 먼저 찾아온 봄 처녀 수선화를 맞아야겠다.

봄을 제일 먼저 알려준 노오란 수선화가 보이는 가에 모여 앉아 새파란 풋김치와 파 강회로 맑은 새 봄을 맛 봐야겠다. 수선화를 바라보며 그분들의 성공담을 곱씹어 듣는 맛도 한 몫을 톡톡히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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