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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7월 12일 일요일

갈등의 출구






2020년 7월 10일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에 실린 글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펜데믹으로 모두 어수선하고 힘든 상황에 적응하느라 마음도 몸도 편치 않은 요즘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인종간의 갈등문제로 연일 보도되는 상황은 날이 갈수록 더 활활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좌불안석에 염려를 놓을 수가 없다.

   외출을 금지당한 자택 격리로 영화를 많이 보던 중 넷플랙스에서 캐서린 스토킷의 원작인 영화 헬프를 봤다. 이 소설은 캐서린 스토킷이 고향 미시시피의 향수와 어린시절의 경험에서 얻은 영감으로 썼다고 한다
   ‘핼프5년동안 60여번의 거절을 당하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빛을 보게 된다. 2009년에 출간되자마자 뉴욕 타임즈와 아마존에서 베스트 셀러1위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발표된 이래 아마존에서는 116주간, 뉴욕 타임즈에서는 109주간 연속 베스트 셀러에 오르면서 300만부 이상 판매되는  큰 성공을 이룬다.
    ‘헬프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아카데미에 최우수 작품상을 비록하여4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고, 미니 잭슨 역의 옥타비아 스펜서는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받았다. 그 외에 여러나라의 국제적인 상을 많이 받았다.
    작품도 훌륭하고 연기도 좋다. 이 내용의 주제는 흑인들은 변변한 직장을 가질 수 없던 시절, 거의 모든 흑인 여성들은 평생을 백인 가정의 가사 도우미로 일하며  헌신적으로 백인들의 자녀를 애정으로 양육하고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대우는 보잘 것 없다. 피부색으로 인한 인종 차별은 박해를 넘어 인간의 기본적인 면모조차 지킬 수 없을만큼 심하다. 그럼에도 분노조차 할 수 없는 억압된  그 시대의 사회상을 다루고 있어 요즘 대두되는 이슈와 맥락을 함께 해 더욱 흥미롭게 감상했다.

   줄거리는1963년 남부 미시시피의 잭슨스키터 역의 엠마 스톤은 당시 부자 남편을 만나 정원이 딸린 집에서 가정부를 두고 사는 것을 최고의 삶으로 여기는 대부분의 여성과 달리  대학을 갓 졸업하고 신문사에 취직한다.
   살림정보 칼럼의 대필을 맡게 된 스키터는 베테랑 가정부인 에이블린의 도움을 받으면서 둘의 관계는 깊어진다. 그녀는 17명의 백인 아이를 헌신적으로 키워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외아들은 잘 돌보지 못해서 비오는 날 트럭에 치어 잃어버린 쓰라린  속사정이 있음도 알게 된다.  에이블린의 친구인 미니는 비바람 몰아치는 날 밖에 따로 분리된 화장실을 쓰지 않고 집안의 화장실에서 소변을 봤다는 이유로  즉시 해고 된다.
   한편 스키터의 문장력이 좋음을 알고 있던 출판사로부터 세상이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에 대해 써보라는 요청을 듣고 스키터는 흑인 가정부들의 고충어린 에피소드를 소재로 재미있는 글을 써서 출판사에 보낸다.
   출판사의 반응은 좋았으나 책으로 내려면 훨씬 많은 에피소드를 써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백인들에 대한 불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로 흑인 가정부들은 아무도 이에 도움을 주려고 선듯 나서지 못한다.
    스키터의 끈질긴 설득으로 난색을 표하던 흑인 가정부들은 하나 둘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털어놓게 되고 일은 일사천리로 마무리 된다.
   스키터는 자신을 여려서부터 길러주었고 29년이나 함께 살아온 흑인 가정부 콘스탄틴이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왔을 때에 없는 것에 실망하고 가당치 않은 이유로 해고되었다는 사실에 아연한다. 스키터는  직접 겪은 자기의 이 에피소드를 하나 더 첨부하여 출판사에 보낸다.
   책은 베스트 셀러의 반열에 오르고 여기에 참여한 모든 가정부들은 생각지 못한 엄청난 고료를 공평히 나누어 받게 되고 스키터는 성공한 작가가 되어 뉴욕으로 떠난다.

    억압의 압축된 힘은 결국 폭팔하게 되어있다. 검은 피부에 대한 차별의 역사는  뿌리 깊다. 이 흑백의 갈등은 과연 언제쯤이나 해소될 수 있을까? 현재 흑인사회의 범죄율과 낮은 교육 수준의 실태를 생각하면 요원하다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절규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러나 무분별한 방화와 절도같은 난폭한 폭동으로는 절대로 갈등의 출구를 찾아낼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2020년 1월 7일 화요일

더 이상 괴물이 아니다






1010년 1월 7일 미주 중앙일보 '열린 광장'에 실린 글입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는 요한 기관인 심장과 허파가 튼한 갈비뼈로 잘 보호 받고 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또 있다. 이는 형체가 없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모두에게 들어있양심이다.
내 생각으로는 양심은 어날 때 갖고 태어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누구나 분명히 갖고 있다. 자라가면서 제라고 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가슴 속 아주 중요한 자리를 기 전까지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차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양심을 나침판으로 들고 자신의 생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아직 을 모르던 때,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섯 살 쯤이라고 생각된다. 서랍에서 큰 돈을 내 대로 가져다가 구멍가게에 가서 마음껏 썼다. 기껏 사탕이나 과자 정도였지만 나도 원 없이 실컷 었을 아니라 동생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신바나게 후한 인심까지 쓰고는 거스름돈 간수를 제대로 못하여 들통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일이 각나기 전에는 양심의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때에 나의 큰 언니가 나를 붙들고 오랫동안 달래고 회유시켜서 자초지종을 캐내었다. 지금 그 전말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열네 살 위의 큰 언니와 씨름하던 기억은 생생하다.
   길 건너 맞은편에는 홍난파 선생께서 지으시고 사시던 붉은 돌로 지은 전망이 좋은 이층 양옥의 저택이 있었다. 큰 나무가 많은 아름다운 정원이 려 있었다. 벽돌 기둥을 세운 철대문 에는 콘크리트가 되어있고 파이프로 난간을 둘렀었는데 여기가 조무래기 또래들의 사랑 받는 놀이장소였다.
   동무들과 공놀이를 할 때 바닥에서는 공이 이리저리로 는데 이곳 반반한 시멘트 바닥은 여자 아이들이 공을 튕기며 놀기에 좋았다. 여름에는 여기가 그늘도 좋아서 서늘한 나무 에서 공기놀이도 하고 또 쇠 파이프에 대롱대롱 달려 홀딱 집기도 하며 놀았다. 길게 벽돌담을 따라가면 반대편에 고 가파른 층계가 있고 그곳에 작은 문이 있었다. 언니와 나는 호젓이 이 층계 마주 아 대결을 벌였다.
   지금도 어제 일인 듯 생각난다. 온 세상을 황홀하게 만들었던 아름다운 노을이 그때 처음으로 내 어린 눈으로 들어왔다. 마주 앉은 언니의 얼굴은 노을빛을 받아 말할 수 없이 예뻣다. 우리는 온 하늘에 져있던 황홀한 붉은 기운이 다 스러지고 른 회색의 어두운 기운이 우리를 감싸 조여 올 때까지 실랑이를 했다.
   언니는 소에 없던 따뜻하고 달콤한 말로 나를 회유시켰고 나는 내 의지의 한계에 이를 때까지 죽자고 버티었다. 나의 양심이 깨어나서 괴롭기 시작하자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방편을 생각해 것이 거짓말이었다. 확실한 정황의 거가 언니 손에 환하게 있다는 앞뒤 판단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냥 아니라고 하다가 말이 막히면 을 들이다가 하는 것이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선의 방편이었고, 결국 얼마 못가서 하나씩 다 말하게 되었다.

   그 일을 전후로 그때부터 양심은 한시도 지 않고 내 가슴 속에 들어앉아 나를 다스리고 조절하고 림해왔다. 이 괴물은 손도 발도 없지만 눈만은 크게 달렸다. 보통은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죽은 듯이 조용히 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눈을 크게 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제 맘대로 황포를 부리면 여간 괴롭지 않다. 이는 또 끈질기기는 그만이라서 내 나를 항복시키고 복종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눈을 감는 이 없다. 그는 내 마음의 하늘을 마음대로 바꾼다. 일기예보는 순전히 그의 손에 달렸다.  그는 바람도 되고 비도 되고, 천둥도 되었다가 번개도 되며, 무지게를 걸었다가 지옥도 만들고 천국도 지었다.
   어느 날, 이렇게 막강한 양심이 내 안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만 아무리 커도 나보다 크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모든 것, 의식과 무의식을 다 합하고 내가 여태껏 습득한 지식, 습, 관념, 철학을 모조리 합한다 해도 너무나 작고 초라한 내 존재가 아니던가? 양심은 내가 자라가면서 함께 자라지만 나라는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 클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생각하니 우습지 않은가? 내가 내 속에 있는 나보다 적은 존재에 의하여 우되고 또 이를 의지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나는 하늘과 땅 그리고 우주 만물이 만들어진 이야기와 태초 이래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가 누구신지 게 되었다. 삼라만상 자연 속에서, 역사 속에서, 나 개인의 생활 속에서 그분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뜻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양심의 소리를 늘 세밀하게 듣지만 더 이상 내 가슴 안에서 닥거리는 양심을 의지하지는 않게 되었다. 하나님은 지식 위의 지식, 법 위의 법, 모든 것 위의 모든 것이다. 나는 이 크고 비밀한 것을 향하여 날마다 조금씩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고, 내 양심도 함께 살찌우며 키워가고 있다.

2019년 11월 7일 목요일

삶의 균형





2019년 11월 11일자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란에 '균형 있는 삶을 사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삶의 균형


   균형, 발란스! 참 아름다운 말이다. 우리는 훌륭한 예술작품 속에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조화된  균형을 볼 때에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한다.  균형이 깨지면 아름다움도 망가진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삶의 균형이 깨지면 불안해지고 행복은 그 찬란한 빛을 잃어버린다.

   둘째 손자가 카타리나 섬에 다녀 오는 날, 집에 들어오면서 검지를 치켜들고 우는 시늉을 했다. “아우 아퍼! 독수리가 내 손가락을 물었어요!” 고추세운 검지 손가락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가 부리를 박고 손가락 끝에 얹혀있다.
   기념품으로 사온 이 독수리는 무게 중심이 부리 끝에 모여있다. 독수리의 외양으로 보면 부리는 제일 앞쪽이고 몸체는 뒤에 있어서 부리 끝에 무게 중심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완벽한 무게 중심을 부리 끝에 두고 뾰족한 위에 오뚝 균형을 잡고 선 독수리의 묘기가 신기하게 보여 호기심이 발동하고 재미있었다.

   우리는 어쩌면 걸음마를 배우기 이전부터 애써서 균형감각을 키워간다.  외줄을 타며, 평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떨어져내릴 위험을 안고 비틀거려야 하는 광대처럼, 위험천만한 곡예를 멈출 수 없이 감내하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
   삶에서의 균형은 물리적인 평형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데에 있다. 개인적인 기호와 의무를 사회적인 인종, 문화, 관습,  종교, 철학의 관념에 어떻게 안배하고 접목하는지에 따라서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이루어간다.
  체력은 팔과 다리의 길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하루는 24시간으로 제한되어있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쓸지, 내게 허용된 물질은 어디에 어떻게 소비할지, 인간관계는 어떻게 형성해갈지. 순간 순간의 선택은 이어지고 합쳐져서 인생을 직조해낸다.  일차원도 아니고 이차원도 아니고 삼차원도 아닌 다차원의 복합적인 영향을 분별하여 선택해야 한다.
   올바른 선택은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른 선택은 방향을 비뚤어지게 하는 요인이 된다. 허나 심사숙고할 충분한 시간의 여유가 없음에도 우리는 순간 순간 숨차게 밀려오는 선택의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때로 우리가 절치부심 골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도 모를 일이 종종 생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진퇴양난에서 끙끙대지만 시간은  동정심이란 눈꼽만큼도 없이 매정하다. 기다려주지 않고 달려가버린다.
   삶의 균형은 평형이 잘 잡혀야 하지만 평형은 평등하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학적으로 균일하고 균등하다고 되는것도 아니다. 보고 느끼기에는 크고 무거운 일이 실제로 작고 가벼운 일에 중요성과 가치를 양보해야할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다양한 색갈과 크기와 비중이 어우러져서 대비와 대칭, 보완으로 잘 조화를 이룰 때에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우선과 차선의 순위가 분명해야한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싶은 것, 내가 싫지만 꼭 해야하는 것을 두고 면밀히 저울질 해서 선택하고 실행해야 한다.
   개인 삶의 균형이 깨지면 가정의 틀이 보루가 되어야 한다. 개인의 삶에 균형이 너무 크게 깨져서 그 파급이 가정의 보루를 넘어서면 사회가 보루가 되어야한다.  법과 제도가 필요한 이유다. 사회의 균형이 깨진 물결이 너무 거세면 나라까지 흔들리게 된다. 이에 균형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 절감하게 된다.
   균형은 잘 잡아놓아도 세파와 풍파에 곧 밀리고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을 재간은 없어도 균형이 아주 깨져버리는 불행을 맞지 않으려면 개인에게는 가치관의 확립이, 사회에는 건전한 제도가, 국가에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이 요구된다.

   둘째 손자가 카타리나에서 사온 독수리 미니어쳐를 나무 젓가락 끝에 얹어보았다. 10도 쯤의 기울기로 이쪽 저쪽 기우뚱거리며 빙그르르 돌다가 오똑 멈춰섰다. 날개를 활짝 편 모양이라 마치 나르는 듯,  뾰족한 끝에 얹힌 모양새가 다시 봐도 신기했다.
  때로 큰 국난이나 사회적인 불안상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불굴의 역경을 딛고 두각을 나타내는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이 나타날 때가 있다. 이런 위인들은 벼랑 끝에 서있을수록 밤하늘의 별처럼 길이 빛난다.  이들의 선견지명은 어쩌면 확고한 가치관의 정수를 한 눈에 알아보는 비범한 투시 역량이 있고, 이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거침 없이 희생할 수 있는 결단력과 실행 능력이 있었던 결과이리라.

   나같은 범인은 개인 삶의 균형, 좀 더 나아가서 가정의 균형만 잘 잡아나가도 성공한 인생이다. 가정안에서만 해도 사랑과 존중, 격려와 타협, 책무의 분담, 비전의 공유를 잘 조화시켜 매끄럽게 꾸려나가는 일만도 벅찬 일이다.
   균형잡힌 가정에서 뿌려진 씨앗들이 대를 거르는 동안, 누가 알랴? 인류에 보탬이 되는 거목이 생성될지?

2019년 9월 20일 금요일

아름다운 발




2019년 9월 18일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난에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발'이란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지인이 인터넷으로 '아름다운 '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아름다운 ? '아름다운 '이라고 하면 실제 적으로 아름답게 생겨서 길고 하얀 손이라든가 솜씨 좋은 유명 화가의 손을 생각하게 된다. 상징적인 의미로 인격적인 또는 인정적인 손길을 생각하게도 된다. 그래서 '아름다운 '이라고 하니 실지로 예쁘게 생긴 사실을 말하거나 아름다운 행적의 발길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제목의 글을 클릭하자 먼저 사진이 화면에 . 사진에는 발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나는 얼굴을 그렸다. 어쩌면 이렇게 오스럽게 흉측…. 생전에 이렇게 찍하게 이상한 발을 적이 없다.
  발가락 마디마다 불거지고 꾸덕살이 기형으로 붙어있다. 얼른 화면을 바꾸려다 제목이 생각나서 다시 마음을 바꾸어 사진 아래 실린 글을 봤다. ‘ 발은 귀병을 있는 사람의 발이 아닙니다'라고 시작했다. 글을 읽고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감동의 가슴을 누르고 다시 사진의 발을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발은 한국이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다. 하루 열아홉 시간씩, 일년에 천여 레의 토슈즈 떨어지도록 연습에 정진 했다고 한다. 거의 인간의 한계에 도달한 수준이다. 그녀의 뛰어나게 수려한 미모에 반하여 완전 반대로 대비되는 모양새다.

   발레리나가 끝으로 서서 사랑과 욕망, 갈등과 분노, 절망과 희망같은 극적인 삶의 여정을 동동걸음으로 표현할 때에 우리는 아름답게 정제된 애절함으로 그녀를 쫓으며 가슴을 콩닥거리다가 슬픔에 겨워 울기도 하고 가슴 벅차게 웃기도 한다.
   발레리나가 가벼이 공중을 높이 떠올랐다가 사쁜히 내려앉으면 우리는 인간의 날고 싶은 근원적인 욕망을 성취시켜주는 희열에 마음속에 솟구치는 기쁨과 요동치는 감격을 느낀다. 그러나 토슈즈 속의 그녀의 발은 극한의 고통을 침묵으로 버티고 견뎌내야만 한다.
   완벽에 가까운 극치의 아름다움을 표현해 내는 경지!
   그에 달하기 위한 수천만번의 피나는 연습!  
   각고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받아낸 !  
   고통의 멍울이 뭉치고 다져져 옹이가 되어 흔적으로 남았으니 어찌 발을 아름답다 하지 않을 있을까?
   고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겠고 세계적인  명성이 그냥 어지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미루어 짐작할 일이지만 그녀의 의지와 집념에 감탄하지 않을 없다.
   그녀의 발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이를 성취한 의지의 발판이 되었다. 토슈즈 속에서 고통의 응어리가 뭉쳐 그렇게 변형되면서까지 끝끝내 인내와 성을 다했다.
   발레리나로는 세계 최고의 자리에 고령의 나이로 현역을 감당했던 그녀의 신조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저 오늘을 충실히 최선을 다한다이다.


 전혀 아름답게 생긴 발은 아니나 생각사록 진정 눈물겨운, 아름다운 발이라 말하지 않을 없다. 잠시 보기도 꺼려 피하려했지만, 내용을 알고 다시 바라보니 경의의 입맞춤이라도 보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