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2월 17일 월요일

어제 다음날


2018 12월 17일 '이 아침에'란에 실린 글입니다.









   “여보 오늘이 며칠이지?”요즘 직장에 출근을 하지 않고 집에서 특별한 일이 없이 지내다보니 날짜를 모르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남편이 “응, 어제 다음날.”시침을 뚝 떼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별 억양 없이 대꾸했다. 짓궂었지만 눈을 컴퓨터 화면에 고정한 남편을 방해하기 싫었고 또 약간은 부끄러운 생각도 들었기에 그냥 넘기기로 했다.

   글을 써 보겠다고 작심한 뒤로 책을 많이 읽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난시가 있어 책을 삼십분 정도 읽으면 벌써 두통이 시작된. 내가 평생 책 읽기를 게을리 해서 책을 읽고자 마음을 정하고 보니 읽어야 할 책, 읽고 싶은 책들이 너무나 많다. 못 읽어본 고전들 뿐 아니라 예전에 읽었어도 다시 읽어볼 책이 많다. 더하여 신간들도 너무나 많은 좋은 책들이 쏟아져 나온다.
   동네 도서관에서 빌려보기도 하나 미국 도서관에 비치한 한국책이란 독서 욕구를 충족시켜주기엔 너무 부족하다. 그래도 요즘은 여기서 삼십오 마일 밖이지만 엘에이에 한국 서점이 여럿 있어서 마음만 먹으면 책을 살 수 있다. 서점에 없는 책은 주문하여 구해볼 수도 있어서 옛날에 비하면 썩 좋아진 사정이다. 그러나 비용도 많이 들뿐 아니라 보고난 뒤에 쌓이는 책들도 부담스럽다. 그래서 주위의 지인들에게 어떤 책을 읽었고, 또 좋았었는지 자주 묻게 된다.
   얼마 전에도 아는 사람에게 책을 여덟 권을 빌려왔다. 그런데 내 사정을 알고 있는 다른 사람이 자진하여 책을 또 다섯 권을 빌려 주었다. 물론 마다하지 않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며 받아왔다. 얼른 보고 곧 돌려줄 심산으로 책에 묻혀 지내다보니 날 가는 줄을 몰랐다.

   작년부터 가을에 한국 여행을 계획했었다. 이십일 년 만에 가는 것이니 기대를 많이 했다. 세상사가 뜻대로 되면 얼마나 좋을까? 바로 그 때에 시어머님이 소천하심으로 올해로 미루었었다. 단풍 철이면 좋겠지만 어머님의 일주년 추도 예배가 딱 그때여서 철을 넘겨 좀 비끼더라도 꼭 다녀오리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정말 예기치 않게 내 턱뼈 속에 묻혀 잠자던, 있는지도 몰랐던 사랑니가 말썽을 부렸다. 수술로 빼내고 치료받다보니 한국엔 이미 겨울 추위가 시작되었다. 기대했던 한국 여행은 또 무산되고 말았다. 여행을 취소하고 나니 올 한해가 다 밋밋했던 것 같은 기분이다.

   금년은 날씨도 춥지 않다보니 아직 세모의 기분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벌써 추수 감사절이 닥쳤으니 이해도 저물어가는 십이월이 며칠 남지 않았다. 돌아보니 올해는 그저 평탄하게 지난 것을 감사해야 할지, 책을 좀 읽은 일 외에 한 일이 별로 없다. 남편을 짓궂다고 탓하려다보니 정말 그의 말이 맞다. 오늘은 그저 담담히 어제의 다음날일 뿐으로 그렇게 지나왔다.
   그렇다고 시간이 많아서 일탈의 여유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쫓기듯이 살지는 않아도 늘 시간이 모자라서 동동거렸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아는 사람들에게 변변히 인사도 전하지 못하고 살았다.
이제부터라도 서둘러 격조했던 친지들의 안부를 묻고 성탄과 세모의 인사를 전해야겠다. 새해는 어떻게 보내야할지도 생각도 해봐야겠다. 지나간 열한 달은 제쳐두고 남은 한 달이라도 생각 있는 자세로 보내어 한 해의 마무리를 깔끔히 하고, 다가오는 새해를 설계하려 마음을 다져본다.

어제 다음날일 뿐인‘어제 같은 오늘’’오늘 같은 내일’을 생각 없이 흘려보내지 말아야겠다. 세상사 뜻대로 안되는 경우도 있지만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도 있다. 어제같은 오늘이면 필연적으로 오늘같은 내일이 있을 뿐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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