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7월 26일 일요일

텃밭 농사 1


팬데믹으로 출입이 통제되자  딸이 홈디포에서 두시간 반을 줄을 서서 호박, 오이, 도마도의 모종을 사다가 내게도 나누어 주었다. 

날마다 서로 농사의 현황을 사진과 동영상으로 주고 받으면서 서로 배운다. 
"오이 모종에서 가늘고 긴 줄기가 나왔는데 이상해요.  그게 뭐죠?"  "그게 오이 손이야. 넝쿨이라서 무엇을 붙들고 올라가려는 것이니까 나중에 오이가 무겁게 달려도 좋을만 한 튼튼한 지지대를 만들어줘라. "
나비와 나방이 날아들자 벌레가 생겨서 잎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약을 치면 좋겠지만 오개닉으로 먹으려면 일일이 애벌래를 잡아내야 했다. 
딸은 사마귀가 벌레와 곤충들을 잘 잡아먹고 먹성이 좋다고 한다며 벌레 퇴치 용으로 인터넷으로 사마귀 알을 주문했다. 내게도 그걸 원하느냐고 물었다.  
 난 어렸을 때에 어른들이 사마귀를 일명 오줌싸개라 하고 사마귀 오줌에 쏘이면 눈이 먼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큰 눈이 달린 대가리가 360도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고 괴력의 곤충으로 알았고 약간의 공포심까지 갖고 있었다.
사마귀 알은 알집에 투명한 알을 섬세하게 박아넣은 연한 갈색의 마른 덩어리였다. 아주 가볍다. 



나중에 알에 직접 손대지 않고 나뭇가지에 걸어놓을 수 있도록 실에 매달아서 뚜껑에 고정시켜 놓았다.
약간의 습기를 주기 위해 바닥에 젖은 페퍼타올을 깔았다. 
화씨 75-85도 온도에서 2-6주면 부화한다고 했다.



딸네 사마귀가 먼저 부화했다.
어느날 갑자기 새끼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고 했다.
먹이를 넣어주지 않으면 나중에는 서로 잡아먹는다고 한다.


텃밭에 사마귀를 풀어놓았더니 앗뿔사!
어린 사마귀는 행동이 아직 굼뜬데 개미가 떼로 달려들어 씨름 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애면 글면했다고 한다. 몸집으로는 개미의 열배는 크고 살아있는 새끼 사마귀가 개미들의 협공에 잡혀속수무책으로 잡아먹힌다.
나뭇가지에 아직도 부화중에 계속 사마귀가 나오는 알집을 걸어두었더니 한나절 후에 보니 까만 개미덩어리가 되어있더라 했다.

결국 하나도 남기지 않은 듯 다음날은 찾아봐도 사마귀를 찾을 수 없었다 했다. 치열한 생을 이어가기란 그들도 쉽지 않은 듯.


 오이는 열려서 자라기 시작하면 날마다 일인치는 자라는 것 같다.
말 그대로 쑥쑥 자랐다.

오이는 달고 향이 진하고 아삭아삭하여 씹는 맛이 좋다!


도마도는 쑥쑥 키가 자라면서 열리기 시작하더니 다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빨리 열리고 익어간다.

나무에서 익은 도마도는 한국에서 먹던 도마도의 그맛이다.
당도도 높고 향도 진하고 부드럽게 연하다.!

멸치를 다듬고 그 대가리와 똥을 병에 담고 물을 부어 썩혀서 그 물만 딸아서  비료로 주었다. 건더기가 남으면 또 물을 부어 썩혔다.
병 뚜껑을 덮어놓으면 괜찮은데 물을 딸아내서 밭에 주면 냄새가 지독하게 많이 난다. 그래서 아침에는 주지 않고 저녁에만 주어서 땅으로 스미게 했다.


2020년 7월 12일 일요일

갈등의 출구






2020년 7월 10일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에 실린 글입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펜데믹으로 모두 어수선하고 힘든 상황에 적응하느라 마음도 몸도 편치 않은 요즘이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인종간의 갈등문제로 연일 보도되는 상황은 날이 갈수록 더 활활 타오르는 불길 같아서 좌불안석에 염려를 놓을 수가 없다.

   외출을 금지당한 자택 격리로 영화를 많이 보던 중 넷플랙스에서 캐서린 스토킷의 원작인 영화 헬프를 봤다. 이 소설은 캐서린 스토킷이 고향 미시시피의 향수와 어린시절의 경험에서 얻은 영감으로 썼다고 한다
   ‘핼프5년동안 60여번의 거절을 당하는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빛을 보게 된다. 2009년에 출간되자마자 뉴욕 타임즈와 아마존에서 베스트 셀러1위에 올랐다. 뿐만 아니라 발표된 이래 아마존에서는 116주간, 뉴욕 타임즈에서는 109주간 연속 베스트 셀러에 오르면서 300만부 이상 판매되는  큰 성공을 이룬다.
    ‘헬프는 영화로도 제작되어 아카데미에 최우수 작품상을 비록하여4개 부문의 후보에 올랐고, 미니 잭슨 역의 옥타비아 스펜서는 아카데미 여우 조연상을 받았다. 그 외에 여러나라의 국제적인 상을 많이 받았다.
    작품도 훌륭하고 연기도 좋다. 이 내용의 주제는 흑인들은 변변한 직장을 가질 수 없던 시절, 거의 모든 흑인 여성들은 평생을 백인 가정의 가사 도우미로 일하며  헌신적으로 백인들의 자녀를 애정으로 양육하고 생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대우는 보잘 것 없다. 피부색으로 인한 인종 차별은 박해를 넘어 인간의 기본적인 면모조차 지킬 수 없을만큼 심하다. 그럼에도 분노조차 할 수 없는 억압된  그 시대의 사회상을 다루고 있어 요즘 대두되는 이슈와 맥락을 함께 해 더욱 흥미롭게 감상했다.

   줄거리는1963년 남부 미시시피의 잭슨스키터 역의 엠마 스톤은 당시 부자 남편을 만나 정원이 딸린 집에서 가정부를 두고 사는 것을 최고의 삶으로 여기는 대부분의 여성과 달리  대학을 갓 졸업하고 신문사에 취직한다.
   살림정보 칼럼의 대필을 맡게 된 스키터는 베테랑 가정부인 에이블린의 도움을 받으면서 둘의 관계는 깊어진다. 그녀는 17명의 백인 아이를 헌신적으로 키워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외아들은 잘 돌보지 못해서 비오는 날 트럭에 치어 잃어버린 쓰라린  속사정이 있음도 알게 된다.  에이블린의 친구인 미니는 비바람 몰아치는 날 밖에 따로 분리된 화장실을 쓰지 않고 집안의 화장실에서 소변을 봤다는 이유로  즉시 해고 된다.
   한편 스키터의 문장력이 좋음을 알고 있던 출판사로부터 세상이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에 대해 써보라는 요청을 듣고 스키터는 흑인 가정부들의 고충어린 에피소드를 소재로 재미있는 글을 써서 출판사에 보낸다.
   출판사의 반응은 좋았으나 책으로 내려면 훨씬 많은 에피소드를 써야 한다고 요구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백인들에 대한 불만을 터놓고 얘기할 수 없는 분위기로 흑인 가정부들은 아무도 이에 도움을 주려고 선듯 나서지 못한다.
    스키터의 끈질긴 설득으로 난색을 표하던 흑인 가정부들은 하나 둘 그들의 억울한 사정을 털어놓게 되고 일은 일사천리로 마무리 된다.
   스키터는 자신을 여려서부터 길러주었고 29년이나 함께 살아온 흑인 가정부 콘스탄틴이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 왔을 때에 없는 것에 실망하고 가당치 않은 이유로 해고되었다는 사실에 아연한다. 스키터는  직접 겪은 자기의 이 에피소드를 하나 더 첨부하여 출판사에 보낸다.
   책은 베스트 셀러의 반열에 오르고 여기에 참여한 모든 가정부들은 생각지 못한 엄청난 고료를 공평히 나누어 받게 되고 스키터는 성공한 작가가 되어 뉴욕으로 떠난다.

    억압의 압축된 힘은 결국 폭팔하게 되어있다. 검은 피부에 대한 차별의 역사는  뿌리 깊다. 이 흑백의 갈등은 과연 언제쯤이나 해소될 수 있을까? 현재 흑인사회의 범죄율과 낮은 교육 수준의 실태를 생각하면 요원하다는 회의적인 생각이 들기도 한다.
   우리 모두는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절규를 귀담아 들어야 한다. 그러나 무분별한 방화와 절도같은 난폭한 폭동으로는 절대로 갈등의 출구를 찾아낼 수 없다는 생각도 든다.

2020년 4월 17일 금요일

코로나의 질주



2020년 4월 17일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에 실린 글






   코비나 19의 비상령이 내려지기 전내가 소속된 일주일 주기로 모이는 그룹에서 모임의 계속 여부를 논의하는 과정에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평소에 자신감이 넘치는 한 사람이 아니 뭐 그렇게 너무 위축될 필요가 있겠습니까?”고 했다. 이어서 치사율이 그리 높지도 않고 또 인명은 재천인데 뭘 그래요?”라고도 했다. 대부분은 아직 그렇게 깊이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얼른 대답할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에 한 사람이  메스컴에서 너무 호들갑스럽게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자 그러면 나올 사람은 나오고 두려운 사람은 나오지 마세요!”라고 누군가 힘주어 잘라 말했다. 모두들 찬성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적당한 의견을 못 내고 잠시 주춤했다.

   중국과 한국의 상황이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고 이 미국에서도 비상령이 내려지자 갑자기 불안해진 사람들이 사재기의 줄서기를 하고 있다. 상가와 회사, 학교도 문을 닫게 되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위급상황이 아니면 병원의 모든 예약이 취소되었다. 삽시간에 미국 전역에서 감염자가의 속출이 증가되고 날마다 사망자도 늘어났다.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이 금지되었던 권고가 명령으로 바뀌었다.
   나의 친구는 허리 디스크의 급작스런 악화로 거동이 불편하여 겨우 화장실 출입만 하면서 손꼽아 수술날을 기다리다 수술 취소 통보를 받았다.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고 또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 예측하는 지금, 실망이 크고 그 고통과 불편함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그룹에서 모임의 계속 여부를 논의하던 시기와 불과 열흘 사이에 일어난 급격한 사태의 변화다.

   지구촌이 한 손바닥 안에 소용돌이 같이 사람들의 이동 속도가 빨라지다보니 상상도 못할 미증유의 초현실적인 일이 이렇게 무서운 속도를 냈다.  생명을 담보하는 일이니 이것은 재난의 한계를 넘어 전쟁이나 진배 없는 상황이다. 개인에게도 칩거명령이 내려졌지만 나라들도 서둘러 문을 걸어 잠글 수 밖에 없는 지경이다.
   현미경이 아니면 볼 수도 없는 지극히 작은 개체가 온 지구촌을 흔들어대고,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가공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병은 치사율도 무섭지만 전염 속도가 더 무섭다. 그러니 한 발 미리 손을 써서 그 기세를 잡지 않으면 감당이 안 되는 지경이 성큼 다가와 덮치게 되고,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위험에 깔리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이상한 시간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들도, 딸도, 손자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살 맛 안 나는 시기다.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이번 사태로 인해 사회 전반에, 다방면에서 변화의 방향이 꺾이는 변곡점이 될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있겠다. 개인 삶의 자세도 많이 바뀔 것이고, 상권의 형태와 지각이 달라질 것이다. 국제적인 외교문제와 지향점도 변화가 있겠다. 이런 급격한 변화를 인지하고 수용하는 삶을  따라잡지 못하는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은 도태될 것이 자명하다.
   무엇보다도 염려되는 것은 변화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므로 그에 따른 선택과 결정도 단시간에 내려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충분히 숙고할 시간의 여유가 없다. 마치 내가 나가는 그룹에서 모임의 계속 여부를 논의할 때만 해도 아무도 사태의 심각성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그 후폭풍의 후유증을 어렴풋이나마 짐작도 못했던 것과 같다.

   코로나의 질주가 아무리 빨라도 사람의 지혜를 능가하지는 못하리라. 그동안 감사를 모르고 누리던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묵상하자. 밖으로 뻗던 에너지를 안으로 향하여 내실을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저 조용히 느긋하게 성찰의 시간을 갖다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2020년 2월 9일 일요일

영화 '기생충'에 박수를




2020년 1월 28일자 중앙일보 '이 아침에'에 실린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봤다. 골든 글러브상을 거머쥔 떠들썩한 뉴스에다 몸서리 쳐지는 제목이 호기심을 불렀다.
  
 한국의 세 가정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국지적인 이야기지만 빈부의 격차를 주제로 삼고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그림으로 세계적인 논제에 부응하여 각광을 받았다.
    재미를 더하는 것은 대비 설정이다. 부자의 집은 길에서도 더 높은 지대에 있고 창문으로는 탁 트인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내려다 보인다. 빈자의 집은 땅에서도 더 내려간 반 지하방에다 창문으로는 빈민가의 추한  취객의 용변을 올려다 보아야한다. 지하방에 변기를 높이 설치한 그 치밀하고 기발한 발상에 무릎을 치게 한다.
   
   영화는 평범하게 흐르다가 전혀 예상치 못하는 급물살을 타고 상상 밖의 급커브를 하면서 관람자를 꼼짝못하게 붙들고 끌고 가다가 어이없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절정을 이룬다.  다분히 정밀하게 계산된 의도다.
   왜 평소에 너그럽고 후덕한 사장이 주인공 기택의 손에 피살되었을까? 사장은 나쁘다고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평소에 사장에게 감사하던 기택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이유를 영화는 암시적으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사장과 기사인 기택의 신분은 예와 도를  잘 지킴으로 유지된다. 그런데 물리적이면서도 이 예와 도를 넘어가는 막을 수 없는 것이 냄새였다. 기택의 가족 모두에게서 나는 공통된 냄새는 거짓말이나 위선의 노력으로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장네 집에서 양주 파티를 벌이면서 흐드러진 환각의 기쁨을 누리던 기택의 가족은  사장의 가족이 큰 비로 캠핑을 취소하고 돌아온다는 전화를 받는다. 기택의  가족은  이 불벼락 통보에 혼비백산 현실로 돌아오는데 기택 처의 말대로 바퀴벌레를 방불케 하는 비 인간적인 모멸감을 감수하게 된다. 
   사장의 집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기택의 집으로 오는 길은 빈부의 멀고도 먼 격차를 표현하듯 긴 계단의 내리막을 처절하게 비를 맞으며  내려오고 또 내려와야 한다. 잠시의 환각에서 현실로 돌아와야하는 그 거리감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돌아온 낮은  지역의 반 지하방은 홍수로 물이 차고 변기에서는 검은 물이 역류되어 솟아난다. 이 난국을 헤치며 기택은 분출할 명분도 대상도 없는 빈곤에 대한 분노가 고였을 것이다.
   영화의 절정은 얽히고 설킨 살인 현장에서 피에 광분한 기택은 사장이 냄새를 엮겨워하는 모습에 분노의 분출을 사장에게 겨누어 충동적인 살인을 한다.

   실제로 기생충은 숙주에게 빌붙어 영양을 빨아먹지만 숙주가 죽으면 같이 죽기 때문에 숙주를 죽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또 기생충끼리도 서로 잡아먹지 않는다고 한다. 미물이지만 철저히 공생의 도를 지키는 거다.
    오늘날 세계 각처에서 자본주의의 어쩔 수 없는 폐단으로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는 현상이다. 거기다가 인터넷의 소통으로 세계는 더욱 가까이에서 격차를 목격하고 실감나게 느끼게 된다.
   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서 우선되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두 기생충 가족의 빈곤에 대한 허무맹랑한 분노와 대립이 불러온 참사를 그린 영화다. 영화 속에서 가정부의 남편은 숨겨진 지하실에서 기거하는 기생충 삶을 좋아하고 평생을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몸서리 쳐지는 장면이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계획은 무계획이라는 기택도 결국은 그 지하실로 숨어들어 기생충의 삶을 살게된다.
   이 영화는 겉으로 빈부의 격차를 그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자유라는 말 속에는 책임과 의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확실한 의미를 못 깨우친 오늘날 교육의 부재를 더 뼈 아프게 지적하고 있다.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고 한류에 더 튼실한 실력과 저력을 보여준 일은 우리 모두를 어깨가 으쓱하게 만들어주었다.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뚫고 국제적인 큰  상으로 인정을 받았으니 놀라운 비범함에 박수를 보낸다. 



2020년 1월 7일 화요일

더 이상 괴물이 아니다






1010년 1월 7일 미주 중앙일보 '열린 광장'에 실린 글입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는 요한 기관인 심장과 허파가 튼한 갈비뼈로 잘 보호 받고 있다. 이에 못지않게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또 있다. 이는 형체가 없어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지만 모두에게 들어있양심이다.
내 생각으로는 양심은 어날 때 갖고 태어나지는 않은 것 같은데 누구나 분명히 갖고 있다. 자라가면서 제라고 실히 말할 수는 없지만 가슴 속 아주 중요한 자리를 기 전까지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차지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양심을 나침판으로 들고 자신의 생을 살아가고 있다.

   내가 아직 을 모르던 때,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섯 살 쯤이라고 생각된다. 서랍에서 큰 돈을 내 대로 가져다가 구멍가게에 가서 마음껏 썼다. 기껏 사탕이나 과자 정도였지만 나도 원 없이 실컷 었을 아니라 동생에게도 친구들에게도 신바나게 후한 인심까지 쓰고는 거스름돈 간수를 제대로 못하여 들통이 났다.
   지금 생각하면 그 일이 각나기 전에는 양심의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때에 나의 큰 언니가 나를 붙들고 오랫동안 달래고 회유시켜서 자초지종을 캐내었다. 지금 그 전말을 다 기억하지 못하지만 열네 살 위의 큰 언니와 씨름하던 기억은 생생하다.
   길 건너 맞은편에는 홍난파 선생께서 지으시고 사시던 붉은 돌로 지은 전망이 좋은 이층 양옥의 저택이 있었다. 큰 나무가 많은 아름다운 정원이 려 있었다. 벽돌 기둥을 세운 철대문 에는 콘크리트가 되어있고 파이프로 난간을 둘렀었는데 여기가 조무래기 또래들의 사랑 받는 놀이장소였다.
   동무들과 공놀이를 할 때 바닥에서는 공이 이리저리로 는데 이곳 반반한 시멘트 바닥은 여자 아이들이 공을 튕기며 놀기에 좋았다. 여름에는 여기가 그늘도 좋아서 서늘한 나무 에서 공기놀이도 하고 또 쇠 파이프에 대롱대롱 달려 홀딱 집기도 하며 놀았다. 길게 벽돌담을 따라가면 반대편에 고 가파른 층계가 있고 그곳에 작은 문이 있었다. 언니와 나는 호젓이 이 층계 마주 아 대결을 벌였다.
   지금도 어제 일인 듯 생각난다. 온 세상을 황홀하게 만들었던 아름다운 노을이 그때 처음으로 내 어린 눈으로 들어왔다. 마주 앉은 언니의 얼굴은 노을빛을 받아 말할 수 없이 예뻣다. 우리는 온 하늘에 져있던 황홀한 붉은 기운이 다 스러지고 른 회색의 어두운 기운이 우리를 감싸 조여 올 때까지 실랑이를 했다.
   언니는 소에 없던 따뜻하고 달콤한 말로 나를 회유시켰고 나는 내 의지의 한계에 이를 때까지 죽자고 버티었다. 나의 양심이 깨어나서 괴롭기 시작하자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방편을 생각해 것이 거짓말이었다. 확실한 정황의 거가 언니 손에 환하게 있다는 앞뒤 판단을 하기에는 너무 어렸다. 그냥 아니라고 하다가 말이 막히면 을 들이다가 하는 것이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선의 방편이었고, 결국 얼마 못가서 하나씩 다 말하게 되었다.

   그 일을 전후로 그때부터 양심은 한시도 지 않고 내 가슴 속에 들어앉아 나를 다스리고 조절하고 림해왔다. 이 괴물은 손도 발도 없지만 눈만은 크게 달렸다. 보통은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죽은 듯이 조용히 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눈을 크게 고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며 제 맘대로 황포를 부리면 여간 괴롭지 않다. 이는 또 끈질기기는 그만이라서 내 나를 항복시키고 복종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눈을 감는 이 없다. 그는 내 마음의 하늘을 마음대로 바꾼다. 일기예보는 순전히 그의 손에 달렸다.  그는 바람도 되고 비도 되고, 천둥도 되었다가 번개도 되며, 무지게를 걸었다가 지옥도 만들고 천국도 지었다.
   어느 날, 이렇게 막강한 양심이 내 안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만 아무리 커도 나보다 크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나의 모든 것, 의식과 무의식을 다 합하고 내가 여태껏 습득한 지식, 습, 관념, 철학을 모조리 합한다 해도 너무나 작고 초라한 내 존재가 아니던가? 양심은 내가 자라가면서 함께 자라지만 나라는 존재의 한계를 넘어서 클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생각하니 우습지 않은가? 내가 내 속에 있는 나보다 적은 존재에 의하여 우되고 또 이를 의지하고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나는 하늘과 땅 그리고 우주 만물이 만들어진 이야기와 태초 이래 역사를 주관하시는 이가 누구신지 게 되었다. 삼라만상 자연 속에서, 역사 속에서, 나 개인의 생활 속에서 그분을 발견하게 되었고, 그 뜻을 깨닫게 되었다.
   나는 양심의 소리를 늘 세밀하게 듣지만 더 이상 내 가슴 안에서 닥거리는 양심을 의지하지는 않게 되었다. 하나님은 지식 위의 지식, 법 위의 법, 모든 것 위의 모든 것이다. 나는 이 크고 비밀한 것을 향하여 날마다 조금씩 나아가려고 애쓰고 있고, 내 양심도 함께 살찌우며 키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