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8일자 중앙일보 '이 아침에'에 실린 글입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봤다. 골든 글러브상을 거머쥔 떠들썩한 뉴스에다 몸서리 쳐지는 제목이 호기심을 불렀다.
한국의 세 가정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국지적인 이야기지만 빈부의
격차를 주제로 삼고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을 그림으로 세계적인 논제에 부응하여 각광을 받았다.
재미를 더하는 것은 대비 설정이다. 부자의 집은 길에서도 더 높은 지대에 있고 창문으로는 탁 트인 넓고 아름다운 정원이 내려다 보인다. 빈자의 집은 땅에서도 더 내려간 반 지하방에다 창문으로는 빈민가의 추한 취객의 용변을 올려다 보아야한다. 지하방에 변기를 높이 설치한 그 치밀하고 기발한 발상에 무릎을 치게 한다.
영화는 평범하게 흐르다가 전혀 예상치 못하는 급물살을 타고
상상 밖의 급커브를 하면서 관람자를 꼼짝못하게 붙들고 끌고 가다가 어이없는 충격적인 장면으로 절정을 이룬다. 다분히 정밀하게 계산된 의도다.
왜 평소에 너그럽고 후덕한 사장이 주인공 기택의 손에 피살되었을까?
사장은 나쁘다고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고 오히려 평소에 사장에게 감사하던 기택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그 이유를 영화는 암시적으로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사장과 기사인 기택의 신분은 예와 도를 잘 지킴으로 유지된다. 그런데 물리적이면서도 이 예와 도를 넘어가는 막을 수 없는 것이 냄새였다. 기택의 가족 모두에게서
나는 공통된 냄새는 거짓말이나 위선의 노력으로 경계를 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장네 집에서 양주 파티를 벌이면서 흐드러진 환각의 기쁨을
누리던 기택의 가족은 사장의 가족이 큰 비로 캠핑을 취소하고 돌아온다는 전화를
받는다. 기택의 가족은 이 불벼락 통보에 혼비백산 현실로 돌아오는데 기택 처의 말대로
바퀴벌레를 방불케 하는 비 인간적인 모멸감을 감수하게 된다.
사장의 집에서 무사히 빠져나와 기택의 집으로 오는 길은
빈부의 멀고도 먼 격차를 표현하듯 긴 계단의 내리막을 처절하게 비를 맞으며 내려오고 또 내려와야 한다. 잠시의 환각에서 현실로 돌아와야하는 그 거리감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다. 돌아온 낮은 지역의 반 지하방은 홍수로 물이 차고 변기에서는 검은 물이
역류되어 솟아난다. 이 난국을 헤치며 기택은 분출할 명분도 대상도 없는 빈곤에 대한 분노가 고였을 것이다.
영화의 절정은 얽히고 설킨 살인 현장에서 피에 광분한 기택은
사장이 냄새를 엮겨워하는 모습에 분노의 분출을 사장에게 겨누어 충동적인 살인을 한다.
실제로 기생충은 숙주에게 빌붙어 영양을 빨아먹지만 숙주가
죽으면 같이 죽기 때문에 숙주를 죽이지는 않는다고 한다. 또 기생충끼리도 서로 잡아먹지 않는다고 한다.
미물이지만 철저히 공생의 도를 지키는 거다.
오늘날 세계 각처에서 자본주의의 어쩔 수 없는 폐단으로
빈부의 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는 현상이다. 거기다가 인터넷의 소통으로 세계는 더욱 가까이에서 격차를 목격하고
실감나게 느끼게 된다.
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서 우선되어야 할 책임과 의무를 다하지
않는 두 기생충 가족의 빈곤에 대한 허무맹랑한 분노와 대립이 불러온 참사를 그린 영화다. 영화 속에서 가정부의
남편은 숨겨진 지하실에서 기거하는 기생충 삶을 좋아하고 평생을 그렇게 살기를 원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몸서리
쳐지는 장면이다. “절대로 실패하지 않는 계획은 무계획”이라는 기택도
결국은 그 지하실로 숨어들어 기생충의 삶을 살게된다.
이 영화는 겉으로 빈부의 격차를 그렸다. 하지만 속으로는 자유라는
말 속에는 책임과 의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는 확실한 의미를 못 깨우친 오늘날 교육의 부재를 더 뼈 아프게 지적하고 있다.
한국 영화사에 한 획을 그었고 한류에 더 튼실한 실력과
저력을 보여준 일은 우리 모두를 어깨가 으쓱하게 만들어주었다. 문화와 언어의 장벽을 뚫고 국제적인 큰 상으로 인정을 받았으니 놀라운 비범함에 박수를 보낸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