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의 데스크 탑에 널려있는 아이콘들을 정리하다가 뜬금
없는 제목 ‘나는 아주 오래 오래 살고싶다’를 발견했다.
순간, 흥? 내가 이런 제목의 글을 썼던가?
이미 여기 저기서 사그랑대는 몸으로 오래 산다는 것을 난 오히려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순간이나마 어떤 생각으로 이런 제목을 달아놓았는지 도무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얼른 화일을
열어보니 백지여서 허망해 잠시 멍해졌다.
백세시대라는 요즘 인간의 평균 수명이 백년 전에 비하면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지금은 환갑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지만 예전부터 한국에선 환갑에 대소가가 모여 마을의 큰 잔치로 축하를 했다. 한 세기 전엔 서양에서도 결혼식에 양가 부모가 다 생존한 경우에는 크게 경하를 받았다고 한다. 불과 백년 전만 하더라도 오십대의 양가 부모 네 사람이 다 건재한 경우가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문명의 이기들은 사람의 수명을 놀랍게도 이렇게 기적처럼 늘려놓았지만,
인간의 능력이란 본래 온전치 못하다. 욕심이 앞 다투어 리드하는 문명과 이에 뒤질세라
쫓아가는 개인의 삶은 자연의 천리를 거스른 결과 스스로 결함의 테두리안에
갇히게 되었다.
꽃잔치 흐드러진 이 봄날에 느닷없이 달려든 소식, 매모그램에서 발견된 작은 좁쌀 몇 개가 조직
검사 후에 암으로 판정이 났다. 마른 하늘의 천둥은 하늘 깨지는 소리를 냈고 이어 퍼붓는 소나기가 피륙 찢는
소리를 냈다.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의 네 사람 중 한 명은 암을 극복했거나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사실로 내가 암에 걸렸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난 사흘을 천둥과 먹구름의 소나기 속에서 시달렸다. 그러니 난 나를 몰라도
한참 몰랐다. 얼마나 두꺼운 위선의 껍데기를 쓰고 입버릇처럼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는지를.
어차피 물러갈 먹구름도 사라지고 결국엔 그칠 소나기도 멈췄다.
흙탕물의 소용돌이 속에 쓰잘데 없는 것들을 다 떠내려보냈다. 다시 개인 하늘에서는
밝은 햇볕이 내려쪼였다. 잔디의 푸른 색이 한결 곱고, 새벽을 여는
새소리는 더 맑고, 구르는 손자의 웃음소리도 한층 더 크게 들렸다.
이런 소식은 꼭 알려야 할 사람에게 알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나 이제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전할 수 있겠다. 그들의 놀라움을 나의 의연함으로 다독이고 잠재우면서.
이런 소식은 꼭 알려야 할 사람에게 알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나 이제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전할 수 있겠다. 그들의 놀라움을 나의 의연함으로 다독이고 잠재우면서.
Dropbox의 창업자 Drew
Houston은 2005년 모교 MIT의 졸업식에서
‘인생의 컨닝 페이퍼’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그는 24살 때에 인생의 날수가 30,000날이라는 기사를
보고 큰 깨우침을 얻었다고 했다. 그 때, 이미 자기는
9,000일이나 써버렸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반성하듯 자신에게 “내가 뭐하느라
이 많은 시간을 다 썼지?”라고 냉정하게 자신에게 되물었다고 했다. 이 깨우침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으리라.
내가 만일 팔십까지 살면 2,200일, 구십을
산다고 하면 6,000일이 남았다.
생각해보니 쓰잘데 없는 걱정으로, 생각 없는 게으름으로,
가당치 않은 허영심으로, 소견머리 없는 불화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지 모르겠다.
암은 다행히 비교적 착한 암의 초기라 생명의 위협은 없으리라는
소견이 뒤이어 나왔다. 난 안도와 감사의 눈물로 내가 오래 살기를 희망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싫다고, 아니 좋다고 한들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놀랄 일도 아닌 일에 심신을 소진 시킬 일이 아니다. 길던지 짧던지 다만 내게 허락되는 소중한 나날을 감사하고 목전에
있는 모든 것을 힘껏 사랑하며 살리라 다짐한다.
연속적인 수년동안의 가뭄을 해갈시킨 강우량으로 천지는 꽃잔치가
한창인 이봄, 떠도는 구름처럼 흐르는 물처럼 흔적 없이 스러질 오늘의 ‘소생의 소회’를 확실하게 적어둔다. 03/10/19
Drew Houston의 MIT
졸업식에서 한 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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