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일 토요일

걸음마를 시작하며





2019년 3월 2일자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난에 실린 글입니다.



걸음마를 시작하며


   필기 도구를 챙겨서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돋보기를 쓰고 책을 끼고 씨름하듯 읽는다. 눈을 비비고 더듬거리며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린다. 지금 나는 돌아서면 깜빡거리는 기억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걸음마를 시작하고 있다. 글짓기 수업이다.
   학창시절에 나는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던 학생이었다. 기하와 물리의 성적은 언제나 우수했고 화학과 수학은 나에게 쉬운 과목이었다. 음악은 좋아한 반면 미술은 싫어했고, 역사는 오로지 시험 때에 달달 외웠다가 그냥 잊어버렸고, 작문 시간은 몸을 비꼬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시간이었었다.
   장년을 넘어서면서 어느 때부터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전혀 무관심하던 것들에 조금씩 이해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싫어하던 미술인데 그림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다 들기까지 했다. 예전 같으면 가당치도 않았을 무용에도 마음이 갔다. 하와이 민속무용을 잠깐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몸을 움직여서 이야기를 풀어내고 무엇을 표현하는 일이 매력적이고 흥미로웠다. 국악이나 한국무용을 배워볼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역사의 흥망성쇠 속에서도 무궁무진한 묘미를 느끼고, 그 안에서 철학을 배우며 하나님을 만나기도 한다.
   난시가 심해서 책을 읽으면 골치가 아퍼서 명작만을 골라서 의무감으로 읽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의 가장 즐기는 일이 되어버렸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 전혀 새로운 꿀맛 같은 재미와 아름다운 색깔들을 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제일 흥미도 없고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던 글쓰기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변화들은 아마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키우는 중에 나도 함께 자라서 예전에 다 채우지 못한 부분들이 메워지면서 생기지 않았나 싶다. 긴 세월의 삶 가운데서 다양하게 부디치고, 반응하고, 적응하는 동안 나의 미숙한 부분들이 종합적으로 계발되었나보다. 하긴 모든 학문, 아니 문학은 특히 인생 자체에 그 과제와 해답이 있는 것일 테니까.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나와는 좀 거리를 두었던 다른 것들에 흥미를 느끼고 좋아하게 되는 일은 결국 좀 더 온전한 한 인격체로 나아가는 증거라고 믿고 싶다. 새로 시작한 걸음마의 노력이 살아오며 마음 바닥에 가라앉은 회한의 찌꺼기들을 하나씩 퍼 올려서 거르고 바래고 날려버리는 작업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좀 더 가벼워지고 싶다. 지난 날의 시행착오로 부디치고 깨어진 눅눅한 삶의 조각들을 꺼내어 좀더 성숙한 눈으로 다시 바라보기를 원한다. 이것들을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에 말리어 차를 만들어 마시면서 삶의 향기를 다시 음미하고 싶다. 맛은 떨떠름해도 향기는 일품이리라.
   나는 지난날 미처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인해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스러운 순간들이 많이 있었다. 뒤늦게 시작한 걸음마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색칠하는 일에 성심을 다하리라 마음먹고 있다. 바라기는 고운 단풍으로, 아름다운 노을빛으로 내 삶의 끝을 장식하여 아름다운 유산으로 사랑하는 남겨진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다.

   멀고도 먼 길을 걸음마로 시작하는 일이 힘겹고 때론 나를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성급한 욕심을 내려놓고 보면 나에게는 분에 넘치게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살 맛나는 신나는 일이기도 하다. 아직 성취한 것이 없어도 주위에서 받는 격려만으로도 행복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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