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8년 10월 25일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란에 실린 글입니다.
된장녀 유감
밀레니엄 시대에 돌입하면서 된장녀라는 말이 생겨났다.
자기 능력으로 소화할 수 없는 고가의 명품을 갖고 자기의 가치를 그에 의존하는 덜 떨어진 여자를 말함이다.
그게 어째서 된장녀가 되는지 정말 모르겠다. 앞 뒤가 안 맞는 신조어가 어떻게 모두에게
잘 통용이 되는지 자못 의아하다.
된장은 한국 음식중에서 가장 친근하고 서민적인 음식인 점으로
봐도 그에 상응하지 않는 말이고 그 맛의 깊음과 영양가를 생각해도 그에 전혀 걸맞지 않는 말이다.
왜일까?
우선 된장을 만드는 과정을 살펴보자. 된장의 재료가 되는 콩은 곡식중에 제일 영양가가 많고 단단하다. 사람으로 치면 꼭 찬 실력과
영민함에다 강인함을 겸비했다 하겠다. 여기서부터 근본적으로 속된 된장녀의 이미지와는 정 반대다.
메주를 만들기 위해서는 콩을 가마솥에서 연속 다섯 시간
정도 푹 무르게 삶아야한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던 잔재주가 다 무슨 소용이랴. 뜨거운 가마솥 세상의 혹독한 시련을 다 이겨내고 인내하는 동안 옹골차던
단단함도 맥을 못추고 결국은 속까지 푹 물러져야 한다. 졸아서 진이 나고 단물이 날 때까지 지속적인 단련을
견뎌내야 한다.
푹 삶아진 콩은 절구에 넣고 찧어 덩어리를 짓고 바짝 말린뒤에,
항아리에 짚을 켜켜이 깔아 메주를 넣고 뚜껑을 덮어서
띄운다.
밟히고 치이고 문드러져 모양도 색갈도 맛도 완전히
달라져야 한다. 나의 자아는 사그리 무너지고 속이 시커멓토록 썩어야 한다.
더 나은 이상을 품은 일념의 우리만 남아있어야 한다.
깨끗이 씻은 메주를 소금물에 담그어 불리고 덧소금을 뿌려
햇볕에 바랜다.
모두 다 내려놓았지만 꼭 붙들어야 할 것을 위해 왕소금으로
듬뿍 무장한다. 이제는 어설펐던 날들의 냄새나는 추억들, 쓰라린 아픔을 한여름 긴 볕에 바래가면서 차분히 침묵의 시간. 뚜껑을 열어놓고 조용히 곰삭아야
한다.
그래야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소증* 푸는,
속 정 나는
노오란 속장이 만들어진다.
된장은 육해공陸海空 동식물의 어느 재료를 사용해도, 또 어떤 조리법을 써도 다 잘 어울리는 전천후의 품 넓은 고품격의 음식이다. 가장 싸고 흔한 재료나 비싸고 좋은 재료나간에 된장을 조금 첨가하면 깊은 맛을 더해 세상 어느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요리가
된다.
푸른 나물을 무칠때도 그렇고, 비린생선이나 누린 고기류를 조리할 때도 그렇다.
프랑스의 고급 요리를 할 때에도 된장을 조금 넣으면
세상에 어디에도 없는 독창적인 특별한 요리가 되어 세프를 일류로 출세시킨 예도 있다.
나는 된장녀야말로 우리 어머님께나 올려드려야 할 명예로운
말이 아닌가 생각된다. 여성에게는 옴짝 달싹도 못하는 족쇄를 씌웠던 그 조선시대에 태어나서,
일제 강점기의 혹독한 억압, 해방과 건국의 혼란한 소용돌이, 육이오 동란의 끔찍한 사선을 넘어오신 분이다.
질곡의 수난시대를 거치며 살신성인의 골짜기와 등성이를 수없이 오르내리는 그 역경 가운데서 지상의 천국인 가정을 지켜내시고,
자녀를 등 따습고 배 부르게 길러내신 그 여정이야말로 된장이 만들어지는 고비고비의 발효와 숙성 과정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
어디 그 풋 비린내 나는 날콩같은 여자들에게 붙여줄 이름인가?
해마다 정한 날을 받고 온갖 정성을 들여 쓰다듬고 다독이며
장을 담그던 어머니를 보고 자란 나는 도저히 납득이 안가는 된장녀라는 말. 아마도 가늠하기로는 된장을 수없이 즐겨 먹었으면서도 된장이
무언지 모르는 알맹이 빠진 껍데기같은 젊은 세대들이 생각없이 만들어 쓰는 말이라 생각된다.
세월은 칼같이 냉혹하여, 따끈하고 달콤했던 어머님의 보글보글 그 된장찌게는 다시는 천금을 주어도 재현될 수 없는 지금이다! 바라기는 여자라면 누구나 명품 가방을 가져서 된장녀가 아닌 인격자체가
고품격을 갖춘 진정 된장녀가 되는 것을 지양해야 하리라.
*소증(素症):간절히 먹고싶은 증세.채식만 하여 고기가 먹고 싶은 증세.
소증 나면 병아리만 봐도 낫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