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8월 28일 화요일

거벽(巨壁)





미주 문협 신인상 작품

단편 소설

민유자
거벽(巨壁)
                                                  

언제 봄이 오고 여름을 보냈으며 또 어느새 가을이 지나고 겨울도 가벼렸는지?
난 병원 신세를 벗어나고서도 무의미하기만 한 허송 세월로 한 동안을 보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아니 잡을 수가 없었다. 눈만 감으면 경악할 꿈을 꾸고 사지가 오그라드는 고통으로 신음하며 온몸이 땀에 젖어 깨어나곤 했다. 무서운 추락사고는 한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날마다 몇 번씩 되살아다. 꿈이 아니더라도 잠시 의식의 세계가 가라앉는 틈이 나면 끔찍한 순간의 악몽이 떠올라서 나도 모르게 눈을 찔끈 감고 진저리를 치고 소리치며 깨어났다.
몸이 받은 상처의 극심한 통증은 약으로 어느 정도 다스릴 수 있었지만 무의식의 기억 속에 깊이 새겨진 고통의 흔적은 결국 흐르는 시간만이 약이 되었다. 이년여 세월이 흐른 지금, 몸이 받은 외상은 거의 회복된 상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때로 짧은 순간이나마 무의식의 그 순간이 송곳처럼 튀어나올 때가 있다.

*          *

연말이 다가와 그렇지만 백화점은 불경기의 연속가운데서도 화려하고 많은 사람들로 붐볐다. 크리스마스 캐롤 싼타가 등장하고 사람들은 선물 보따리를 한아름씩 들고 바쁘게 걸어간다. 이런 분위기가 오랫만에 반갑기도 하지만 조금은 생경하기도 하다. 이런 상황 속에 내가 멀쩡하게 서있다는 감사가 새삼 뭉클 솟구친다.
숙녀용품 코너에서 요즘 내 맘을 송두리째 앗아간 쥴리를 위해 선물을 고르는데 누가 뒤에서 어깨를 툭 쳤다.
헤이 크리스, 애인 생겼구나! 축하한다. 참 오랜만이다! 어때 이제 괜찮은거지? 와우 보기 좋다!”
“하이 브라이언!, 그래 오랜만이다 너도 좋아보여!”
“아주 마침 잘 만났어! 안그래도 한번 봤으면 했는데. 볼일 많이 남았어?”
“아니 이것만 셈하면 돼 다른 볼일 없어.”
“그럼 우리 요앞에서 잠깐 커피한잔 할래? 오래 걸리지 않을꺼야.”
그럴까? 좋아. 금방 갈께
그래 십오분쯤 뒤에 보자.”
브라이언은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얘기를 내게 전했다. 그가 나와 함께 조난을 당했던 제이슨의 말을 전하는 얘기를 들었을 때에 난 갑자기 피가 머리로 치솟으며 핑글 돌았다.
어불성설!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그 생각에서 잠시라도 나를 떼어내 보려고 지난 이년 동안을 몸부림쳐오다가 이제야 겨우 그 끈질긴 결박을 풀어내고 한 걸음을 옮기는 내 처지가 아닌가? 
“아니 미친놈 아냐? 아무래도 미친 게야! 그러지 않고서는 그걸!  아니, 나도 아직 꿈도 꿀 수 없는 일을 지가 어떠케? 게다가 나까지? 참 기가 막혀서! 같이 미쳐 달라구? 천만에. 어림없지! 어림도 없어. 가만, 머리가 아주 돌아버린 게 아냐? 혼자 조금 그러다 말겠지! 아무렴 저도 생각이 있을텐데 될법이나 한 소린가?”
브라이언 앞에서는 놀라 아연한 표정을 했어도 크게 내색하지 않았지만 집에 돌아와 생각할 수록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제이슨을 만난 것은 팔년 전 한국 설악산에서다. 중학교 2학년때에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10년만에 처음으로 한국 방문을 하게 되었다. 드문 일인데, 마침 직장에서 한국으로 일주일 동안 출장을 가는 기회가 있었다. 난 전부터 설악산의 적벽과 울산바위가 높지는 않아도 난이도가 높다고 들어서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오랫동안 벼르던 한국행이라 2주동안 휴가를 내어 한국에 더 머물면서 장비를 빌려 적벽과 울산바위를 올랐다. 규모는 작아도 듣던대로 매력이 있었다. 울산바위 등반을 마치고 음식점에서 저녁을 먹다가 옆자리의 등산팀과 자연스레 말을 트게 되었다. 난 부모님과는 줄곧 한국말을 써왔기 때문에 한국말을 잊지는 않았다. 일상용어의 한계 안에서는 자유롭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한국 땅에 발을 붙이고 보니 내 한국말 수준은 어눌하기 짝이 없었다.
제이슨은 그 때 알게 되었다. 그네들은 모두 요세미티 등반을 선망하고 있었다. 그 후 두달이 못되어 제이슨을 엘에이에서 만나게 되었다. 그 후로 우리는 틈만 나면 함께 등반을 구상하고 함께 산을 올랐다.

사고 후 팔 개월이 지나서, 아직 내가 온전하지는 않아도 웬만큼 회복되어 출입이 가능하게 되었을 때에야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다행히도, 나 혼자 다행이라고 감히 말 할 수는 없겠으나 아무튼 나는 팔다리가 부러지기는 했어도, 아니 부러진 것이 아니라 부스러졌다고 해야 맞을 정도지만, 어쨌든 지금 팔 다리가 온전히 붙어있다. 그러나 제이슨은 한쪽 다리는 반을 잃어버렸고 나머지 붙어있는 다리조차 감각이 없는 하반신 불구가 되어버렸다.
내가 처음 병실로 제이슨을 찾아 갔을 때 그는 침대머리를 높여놓고 비스듬히 앉아 있었다. 병실에 들어선 나는 그의 모습을 본 순간 마음이 서늘해지면서 두 다리가 얼어붙어 뻣뻣해졌다. 멀쩡히 두 다리로 서 있는 내가 너무나 무참했다. 제이슨은 언뜻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을 정도로 몰라보게 수척해져 있었다. 얼굴엔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나를 맞았으나 그에 대비되는 영혼의 불총을 쏘는 듯한 형형한 눈빛은 그가 깊은 고뇌에 싸여있음이 너무나 강하게 내게 전해졌다.
난 한참을 아무 말도 못하고 제이슨의 손을 잡고 눈물을 삼키느라 애를 썼고 그는 창밖을 바라보며 내가 격정을 가라앉히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간호사가 그를 데리러 와서 오래 있지는 못했는데 난 두서없이 무슨 말을 어떻게 했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게 경황이 없었고, 병실을 떠나오는데 가슴이 조여오듯 아팠다.
그 후로 난 제이슨을 찾아가지 않았다. 성한 두 다리로 그의 앞에 서기가 너무나 미안하고 힘들고 싫었다. 편안히 대화를 나누거나 일상의 안부를 묻기조차 두려웠다.

처음에 우리가 의식을 회복하고 나서 서로의 목소리를 들었을 때는 오직 살아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목놓아 울며 감격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점점 살아있다는 감격보다는 불구가 되어야 할 지도 모른다는 상실감과 당장 육체의 고통을 견뎌야 하는 나날들만으로도 지탱하기가  힘겨워졌다. 그러면서 그 동안 나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가끔 제이슨의 소식을 듣기는 했어도 서로 안부를 묻는 일조차 멀리해 왔다. 악몽을 되살리는 일이 너무 두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 없이 혼자 곰곰이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는 그 때의 그 순간이다. 아직도 나는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사고의 충격으로 그 순간의 기억이 달아났는지?
강풍이 심히 불기는 했었다. 그래서 공식적인 사고 원인이 심한 강풍 때문이었다고 발표되었고 모두들 그렇게 알고 인정했다. 그렇다고 제이슨과 더불어 그 때의 장면을 더듬어 세세히 되짚어보지는 못했다. 나는 실오라기 잘못이라도 누구의 어디에 있었는지? 또는 사고를 방지할 여지는 없었는지를 허심탄회하게 그와 얘기할 수 있을 만큼 강하지 못했고 마음의 평정을 되찾지 못했다. 하지만 혹여 누구의 실수가 있었다 한들 지금에야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일기예보를 봤을 때, 오후에 바람이 좀 분다고는 했지만 풍속이 높지 않았고, 구름대가 좁고 등반지점과는 좀 비껴있어서 문제 없겠다는 판단이 섰었다. 이 등반은 오래전부터 열망해오다가 계획하고 준비한 일이었고, 우리는 둘 다 그 정도의 장애는 극복한 경험이 있어서 중도에 포기하기보다는 이 야심찬 계획을 그대로 진행하기로 합의하고 나섰다.
한 시간이면 넉넉히 제 이 비박 지점에 도달할 수 있을 즈음, 바람이 조금씩 불기 시작하더니 비가 뿌리면서 기온이 급격히 떨어지고 우박이 섞인 차가운 빗살이 뺨을 때렸다. 때가 월 중순이라 아직 본격적인 겨울은 아니므로 눈이 와서 쌓이거나 빙벽을 이룰 시기는 아니다. 점점 강해지는 바람 때문에 먼저 올라간 제이슨과 의사 전달이 잘 안됐. 하지만 우리는 함께 해온 시간이 많은 어우러진 단짝이였으므로, 빨리 바람이 잦기를 바라면서 신중을 더하여 잠깐 멈추기도 하고 한발 한발 조심스레 오르기도 했다. 비는 오래지 않아 잠시 후에 그쳤다. 그러나 젖은 바위는 미끄러웠고 옷은 젖고 추웠다. 해가 기울면서 기온은 더 내려갔다. 완전히 깜깜하게 어둡기 전에 비박지점에 도착하도록 서둘러야 했다. 서쪽 하늘의 구름만 걷혀주면 지상보다는 해가 좀 더 늦게 진다. 아직은 많이 지치지도 않았고 마음의 평정도 잃지 않아서 두렵거나 걱정을 하지는 않았다. 비박지점이 멀지 않았고 비바람도 곧 그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비박지점이 머리 위에 저만치 보이는 곳에서 홀링 지점이 오른쪽으로 약간 멀리 치우쳐 있어 펜듈럼을 해야 했다. 마침 바람이 좀 잔 듯해서 나는 홀백을 안고 막 발을 굴러 힘껏 날았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운명의 요정이 심술이 발동했는지, 아니면 갑작스런 재채기라도 터트렸는가? 때마침 미친 회오리바람이 휘익 맞닥뜨리면서 저항을 받아 방향이 약간 틀어졌고, 나는 그만 스토브 크랙을 놓치고 회전하면서 바위에 두 번을 부딪쳤다. 고통으로 정신이 아뜩하면서 잠시 멍해졌다. 그 다음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될성부르지도 않거니와 정말 생각조차 하기 싫다. 내 일생에 다시 암벽 등반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상상할 수도 없이 끔찍하고 몸서리쳐진다. 암벽등반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어떠한 극한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정과 균형을 유지하며 끝까지 한 치의 오판도 없이 신중하게 집중하는 일이다. 두려움이나 걱정으로 마음의 평정을 조금이라도 잃으면 순식간에 죽음이 문턱을 썩 넘어와 덮치게 된다. 극한 상황은 비바람이나 기온, 암벽상태같이 외부적인 악조건도 있지만 그에 더해 부상이나 허기와 갈증, 탈진 같은 신체적인 조건도 있다. 보통은 외부적인 조건과 신체적인 조건이 함께 더해지기 마련이다.
호랑이 앞에서도 정신만 바짝 차려라? 그러나 호랑이 앞에서는 생사간에 그리 긴 시간이 필요치 않다. 허나 등반은 단시간에 끝나는 일이 아니다. 수 시간, 아니 어떤 때는 수십 시간씩, 그리고 밤을 지새우며 지속적으로 견디고 싸워야 한다. 시간이 길어질수록 위험도는 무섭게 더 가중된다.
참 이상한 것은 등반가들이 짧은 성취의 희열을 맛보기 위해 오랜 준비와 고행을 감내 할 뿐 아니라 다 이루어낸 후에는, 또 다시 더 어렵고 더 많은 고행을 감내해야 하는 곳을 찾아다니며 계획한다는 사실이다. 전문적인 등반가는 보통 사람들은 이해 못할, 어찌 보면 정신이상이라 할 중독과 집착의 면모가 있는지도 모른다. 수많은 난관에 철저한 절제와 무서운 집중력으로 그런 어려움을 이겨낸 경험들은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두려움을 굴복시키고 반드시 승리의 기쁨을 안겨준다는 믿음을 키운다. 그런데, 그게 이고 나니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자라기 시작했다. 게다가 다시 생각해보니 꼭 그래야 할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젠 그렇게 하기조차 그만 싫어졌다.

그런데 제이슨이 다시 등반을 꿈꾼다고 했다. 더욱이 나와 함께 등반하기를 원한다지 않는가? 하기사 나말고 그가 누구를 꼽을 수 있을까? 브라이언의 말에 의하면 제이슨은 벌써 육 개월 전부터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수련을 시작했다고 한다.
 제이슨은 나보다 두 살이 어리다. 그래도 신중하고 내성적인 성격인데다 말수가 적어서 어떤 때는 나이를 잊고 오히려 내가 더 어린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형님 같은 믿음이 가는 친구였다. 마음의 희비를 잘 표현하지 않는 제이슨 앞에서는 내가 평소보다 오히려 말수가 더 많아지고 소소한 감정까지 쉽게 풀어내곤 했다. 제이슨은 좀처럼 큰 소리로 웃는 때가 없다. 내가 때구르르 구르면서 허리를 꼬고 웃어대도 그는 그저 하얀 이를 드러내고 싱긋이 웃을 뿐이다. 나는 하고 싶은 것도 많고, 하기 싫은 것도 많다. 먹고 싶은 것이 다양할 뿐 아니라 먹기 싫은 것도 많지만 제이슨은 늘 나 하자는 대로 따라와 주는 편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격이나 기호나 여러 면에서 참 많이 다른데도 늘 잘 붙어 다니면서 좋은 등반 지기가 되어왔다.
제이슨은 일반 세상살이나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는 무지할 정도로 무심했다. 그는 나와 달리 유복한 집안의 장남으로 세상을 즐기려 들면 아무 구애없이 즐길 수 있는 여건이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나는 이곳의 여늬 이민 가정에서처럼 부모님의 고생을 지켜보며 자랐고 일과 공부를 겸하며 부단히 노력하여 전문직을 얻었지만, 제이슨은 한국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의 기업을 절로 물려받을 자리에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전혀 욕심도 관심도 없어 그 자리를 동생이 대신했다. 그러나 등반에 관한 한 제이슨은 욕심도 야망도 많아서 난코스를 만나면 꼭 선등을 고집해서 나를 약 오르게 했다.
제이슨은 등반에 관한 한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이 박식하고 철저했다. 역대 등반가들의 역사라든지, 세계 곳곳의 명산들의 지리적인 상황파악이라든지, 새록새록 개발되는 첨단 장비와 섬유의 특성까지 세심하게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등반하는데 그만의 철학이 있었다. 자연과 하나로 동화된 자연과 연계된 듯한 영혼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산을 무척 사랑했고 그점에 있어선 자존심도 강했다. 자연을 되도록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만 최소한의 범주에서 장비를 설치했고 그에 따른 위험을 감수하고 고난을 자처하면서 그럴 때마다 놀라운 집중력과 탁월한 기량을 보여주곤 했다. 그래서 겉으로는 안 그런척 했지만 등반에 관한 한 난 내심 제이슨을 나의 리더로 그를 존중했다.
제이슨과 나는 울타리도 없고, 대문도 빗장도 없이 지내왔다. 도무지 벽을 느끼지 않았다. 쉽게 넘어오고 넘어갈 문지방 정도만 있다고나 할까? 그랬던 것이 그 추락사고 후에는 서로의 회복기간 동안 무서운 기억을 떨쳐버리려고 몸부림치며 애쓰는 사이에 우리 가운데 커다란 벽이 생겨버렸다. 제이슨과 내가 정복하려던 높고 큰 벽은 예기치 않았던 사고로 좌절되자 원치 않게 우리들 사이에 들어와 무겁게 자리 잡아 버렸다.
나는 브라이언이 전해주는 제이슨의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에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고 오히려 제이슨의 정신에 이상이 있는지 의심스러워졌다. 그래서 그가 심히 불쌍한 생각까지 들었다.

·                 *

쥴리초대한 후렌치 래스토랑은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곳이었다. 오래 된 곳은 아닌 듯하다. 크지는 않지만 인테리어가 세련되고 차분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다. 일찍 도착하여 화장실을 들러 나왔지만 아직 이십분이나 남았다. 바에서 주문한 맥주를 막 한 모금 마시는데 걸음걸이도 시원하게 쥴리가 들어오는 게 보였다. 시계를 보니 십분 전이다. 오늘 쥴리는 치마의 앞주름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왼쪽 허리에 모아지는 세련된 북청색 원피스를 입었다. 차분하면서도 고상한 품위가 돋보이는 그녀의 분위기를 잘 받쳐주는 옷이다. 아름다웠다!
“많이 기다렸어요? 내가 늦은 건 아니죠?”
“아직 십분 전입니다. 그래도 기다리긴 많이 기다렸죠”
“어머 그래요? 얼마나 기다렸어요?”
일주일 전부터 기다렸으니 얼마나 많이 기다렸어요?”
“아이 난 또...” 많이 기다렸다는 말에 눈을 크게 떴다가 가지런한 이를 드러내며 웃는 모습을 보니 확 끌어당겨 꼭 안아주고싶게 귀엽다.
음식은 참 맛있었다.  특히 한국계 요리사가 두툼한 통돼지 삼겹살 스테이크를 오븐에서 굽고 크림을 넣은 둣 순한 맛의 다진 김치볶음을 얹어서 내온 요리가 맛있고 좋았다. 보기에도 먹기에도 불란서 요리임에 틀림없으나 저들이 쓰지 않는 식재료인 삼겹살과 김치를 사용해서 창조적인 새로운 요리로 탄생시켰다.  이런 몇가지의 특별한 요리가 그 한국계 요리사를 유명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레스토랑에서 나오는 중에 저만치 화려한 차림새의 어떤 여자가 불안정한 걸음으로 다가오며 아는채를 했다.
어머, 크리스? 맞네!” 그녀는 내 팔을 손으로 살짝 치며 호들갑스럽게 인사를하고 ?” 하며 얼른 인사를 못받는 나를 무시하고 옆의 쥴리를 유심히 눈여겨보더니 생뚱한 질문을 내게 했다.
 근데 내 전화에 왜 답을 안해요? 내가 얼마나 기다렸다구요!”
아니 무슨 ?”
아무튼 오늘은 동행이 있는것 같으니 이만그녀는 가면서 고개를 돌려 쥴리를 보고 눈을 찡긋하고 다시 봐요 우리하며 사라졌다. 비틀거리며 멀어져가는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가 쥴리는 내게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누구예요?”
음 내가 병원에 있을 때 늘 내게 과잉 친절로 귀찮게 굴던 간호사인데 여기서 보네?”
무척 친했나봐요? 스스럼 없이 구는 걸 보니. 그리고 내게 다시 보자는 건 또 뭐예요?”
괘념치 말아요. 잊어버려요.”
왜 그래요 크리스?”
뭐랄까, 원래 좀 종잡을 수 없는 오지랖인 여자예요
아니 왜 그렇게 나쁘게 얘기를 하죠?”
예전에 병원에 있을 때부터 나는 저여자가 무척 싫었어요. 그러니 그 여자 얘기는 이제 그만 하기로 해요. 그보다 오늘 이집 음식은 참 훌륭했어요. 그리고 쥴리가 추천한 삼겹살 스테이크는 정말 환상예요! 여기 자주 와요 쥴리는?”
가끔요. 특별한 날만.”
그럼 오늘도 특별한 날이네?”
, 나는 그런데. 크리스는 안 그래요?”
아 나야 쥴리를 만나는 날은 언제나 특별한 날이죠 물론!”
도착하면 메세지 드릴게요. 조심해가세요.”
안전 운전 알았죠? 전화할게요. 바이!” 난 그녀의 볼에 도둑키스라도 해주고 싶은 것을 참았다.
나는 쥴리가 참 좋다. 쥴리에게 푹 빠져서 그런지 그녀의 나긋하면서도 달콤한 목소리가 늘 귀에 쟁쟁하고 그녀의 냄새가 항상 내 코끝을 맴돌고 있다. 눈을 감아도 요가로 다져진 균형잡히고 시원스런 체격에 단아한 모습이 선명히 떠오른다. 차분한 성격에 지적인 면모가 믿음직하고 푸근하다. 맑고 투명한 밝은 표정도 좋다. 특히 요즘 찾아보기 드물게 상대를 잘 배려하는 따뜻하고 고운 심성이 퍽이나 흐뭇이 좋다.
쥴리가 자동차를 돌려 주차장을 빠져나오는데 아까 그 간호사가 다급히 손짓하며 다가왔다. 자동차 유리를 내리면서 쥴리가 말했다. “웬일이세요?”
잠깐 날 좀 보고 갈 수 있어요? 내가 꼭 할말이 있는데
나한테요? 무슨?”
당신 크리스를 사랑하나요?”
“---? 아니 왜 그걸 당신이 나한테 묻?”
내가 크리스를 사랑하는 여자니까요. 아마도 크리스가 당신 때문에 나한테서 멀어졌나봐요. 그래서 묻는데 당신이 크리스를 사랑하나요?”
내가 왜 이런데서 당신에게 그런 물음에 답해야 합니까?” 쥴리는 황당한 기분이 들어 상대하고싶지 않았다. 기어를 바꾸고 떠날 차비를 하자 그녀가 재빨리 말했다.
내가 크리스의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까요!”
지금 뭐라고 했어요?”
나도 지금 빨리 가야해요. 이리로 전화 하세요그녀는 쪽지를 차안에 던지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가버렸다.
쥴리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저 여자가 미쳤나?”
쪽지에 적힌 이름은 티나였다. 쥴리는 티나가 신빙성이 있어보이지는 않았지만 이 일을 그냥 지나치기에는 좀 껄끄러운 면이 있다고 판단해서 며칠 생각하다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티나는 일도 해야하고 아이도 돌봐야하니 바쁘다며 자기쪽에 가까운 곳으로 정하자고 해서 쥴리는 40여분이나 걸리는 곳을 찾아가서 티나를 만났다. 티나는 집이 가까워 차를 타고 오지 않았는지 간단히 손지갑만 들고 화장도 하지 않은 채 나왔다. 낮에 자세히 보니 화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인데도 아무렇게나 내뱉는 표정과 말씨를 뺀다면 꽤 예쁘게 생긴 여자였다. 투명한 하얀 피부와 오똑한 콧날과 큰 눈, 도톰한 입술이 가히 미인이라 말 할 수 있었다.
난 지금도 크리스를 무척 사랑하고 있고 크리스도 날 좋아했어요. 그러니까 당신은 물러나는 게 좋을거예요! 그게 순서 아네요? 게다가 우리는 아이도 있으니까요!”
티나는 언제 크리스를 만났고 언제부터 좋아했죠?”
그게 무슨 상관예요? 우리는 처음 보는 순간부터 서로가 좋아했다구요. 운명처럼!”
그럼 최근에도 크리스를 만났나요?”
, 그럼요! 아니 얼마전까지는 그랬는데 요즘은그게 다 당신 때문이라구요. 이 모든 책임은 당신이 져야해요. 나는 크리스가 없으면 안돼요.”
크리스가 아직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믿나요? 크리스는 이미 내게 사랑을 고백 했는데요?”
그러니까 당신 때문예요! 당신만 없으면 우리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나는 크리스를 너무 너무 사랑했고 아직 양육비도 한번도 요구하지 않았다구요!”
양육비? 그 아이가 정말 크리스의 아이가 맞나요?”
물론예요! 크리스가 충격받을까봐 말을 안했고 양육비조차도 달라고 안했어요! 당신은 아직 자유로우니까 당신이 먼저 포기하세요. 그러면 우리 모두가 다 행복해질테니까!”
그렇게는 안되겠어요. 크리스는 이미 당신에게서 떠나 나에게로 왔고, 나도 당신 못지않게 크리스를 사랑해요! 내 생각에는 내가 크리스를 거절해도 아마 그는 당신에게 돌아가지는 않을거예요. 양육비가 문제라면 그건 내가 보장할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아요. 우린 정말 당신만 없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구요!” 티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말하다가 울기 시작했다.
안되겠어요. 오늘은 시간도 많이 지났고 우리 다시 만나요쥴리는 울고있는 티나를 남겨둔 채 떠나왔다.

·                 *

난 아무래도 제이슨을 만나야 될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를 만나서 무슨 말로 어떻게 말할지 도무지 모르겠다. 아니, 아니다. 나는 그를 만나기 싫다! 그를 만나는 일 자체가 내겐 고통이다. 되돌아보기 싫은 기억이다. 잊어버리고 싶고 생각하기 싫은 지난 일이다.
하지만 그래도 아무튼 제이슨을 만나기는 해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떠나지 않고 계속 조이고 있다. 우선은 너무 잔인할지 모르지만 일단 만나서 나에 대한 가망 없는 기대를 더 이상 키우지 않도록 확실히 못 박아 말해둘 필요가 꼭 있다. 그래야 내 마음의 짐도 가볍고 또 그에게도 나중에 더 큰 실망을 안기는 일을 미리 막을테니까!
그럼에도 난 좀처럼 제이슨을 만나러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제이슨이 정말로 정신에 이상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점점 더 확고히 들었다. 아니 오죽하면 가망 없는 일을 놓지 못하고 끈질기게 희망하고 있을까? 내 마음에 한줄기 연기가 피어오르듯 통증이 일기 시작했다. 난 이 통증을 잊어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렇게 차일피일 그를 만나는 일이 더뎌지면서 마음 속에서 일렁이는 통증은 검은 안개 퍼지듯 조금씩 더해갔다. 털어버리려고 애를 써도 소용이 없다. 아니 털어버리려 할수록 더욱 끈질기게 생각나고 내게서 떨어지기는커녕 점점 더 나를 옥죄는 느낌이다. 결국 주체할 수 없이 무거워지는 중압감의 무게를 덜기 위해서도 나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제이슨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제이슨을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전과 같지 않았다. 물론 원래의 예전만은 못했지만 사고 후 팔개월 만에 만났을 때처럼 수척하지도 않았고 표정과 눈빛이 다르게 보이지도 않았다. 평정심을 되찾은 듯 일상의 평온한 표정으로 담담히 나를 대했다. 내가 혼자 생각했을 때에 그가 혹시 정신분열 증세가 있지는 않는지 의심했던 것과는 달리 제이슨은 오히려 따뜻한 미소와 다정한 눈빛으로 사고 이전의 그때처럼 나를 스스럼 없이 대했다. 
오히려 내가 안정을 잃고 흔들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레 브라이언에게 전해들은 말을 개진할 때에, 아무 동요가 없는 표정에 땅을 바라보는 자세로 짧게“응” 하고 대답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잃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에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어이없지?” 제이슨은 내맘을 또렷이 읽고 환히 들여다본다는 듯이 말했다.
“물론, 미쳤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 아무렴, 힘들다는 걸 내가 모르지 않어! 알지! 지난번 보다 더 참혹한 일을 당할 수도 있다는 것 충분히 알아!”
“-----“
런데 말야 크리스!----“ 그가 잠시 말을 삼키고 침묵하다가 조용하지만 분명하고 확신있는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꼬옥 그 정상에 실제로 한번 서보고 싶어! 그렇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점점 확실히 들어!”이상한 것은 어처구니없고 미친 생각이라고 단정해 버렸던 내 마음이 제이슨의 말을 듣고 있으니까 슬그머니 좀 누그러졌다.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언제부터?”
“크리스, 너도 알다시피 내가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니?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잖니? 몸이 멀쩡했던 그때도 말야! 등반하는 일 말고는 내가 하고 싶은 일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잖아! 몸이 성할 때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는데 이제 몸이 이렇게 되고 나니 아무 것도 내게 의미가 없더군. 영 죽고 싶은 생각 뿐이었어. 꼭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을 했었지! 이건 하늘의 저주를 받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을 것 같은 처참한 고통 속에서 그렇게 살아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었어. 오직 죽는 길만 생각하고 한동안 실행 방법을 연구했지! 하지만 죽을 수 있는 길? 그것조차 내게는 커다란 사치에 불과했어! 그럴 여건이나 능력조차 허락되지 못했어. 어떤 사람들에게는 행복하기도 했을 그 시간들이 내게는 한없이 혹독하고 잔인했지! 견딜 수 없이, 정말 견딜 수 없이 무서운 깜깜한 고통의 날들이었어!”
------- ”
“내가 의식을 회복하고 깨어나는 날부터 나는 내 의식을 죽이는 약물을 투여 받았어. 처음에는 육신의 엄청난 고통을 덜기 위해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 차차 육신이 회복되면서 육신의 고통은 서서히 줄어들었지만 맨 정신으로는 나도 버틸 수 없었고 미쳐가는 나를 보는 주위사람들도 견디기 힘들었어! 그래서 약물이 아니면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 그렇게 나날을 참 무의미하게 지내다가 난 한가닥 실오라기를 잡듯 고통을 잊는 한 가지 방법을 찾아냈어. 그러지 못했으면 끝간데 없이 아주 영영 미쳐버렸을거야! 
내가 전에 산에 올랐을 때에, 나 혼자 매번 치르는 한가지 순서가 있었어! 마지막 발을 정상에 올려놓고 나서 팔을 벌리고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서있으면, 끝까지 한 치의 오차나 오판을 허용하면 안 된다는 중압감이 없어지면서 갑자기 온 몸이 하늘로 솟으며 부웅 뜨는 그런 황홀한 순간이 있었거든! 그 의식을 치른 다음에야 산 아래를 내려다 보았지. 그때의 그 무아  순간들을 떠 올리는 동안만은 잠시 고통을 잊을 수 었어. 그래서 나는 지난 날 내가 올랐던 산들을 더듬어가면서 차례로 매일 올랐어. 계획하고 준비하는 단계에서부터 정상에 오르고 나서 하산하는 과정 과정들을 낱낱이 재연하면서 약물을 조금씩 줄여나갔어.
근데 어느날 말야, 그 정상에 다시 한 번 꼭 서보고 싶다는 아주 간절한 맘이 들더군! 혼자 씁쓸히 웃었지! 내가 생각해도 어림없는 일이니까. 그런데 날이 갈수록 그 맘이 점점 더 간절해지는 거야. 그 즈음, 신기하게도 죽었던 다리의 신경이 아주 조금이지만 오 퍼센트 가량 살아났어. 물론 너무 미미해서 아직도 죽은 거나 마찬가지로 쓸모가 없었지만, 그래도 내 마음에 누를 수 없는 희망이 자라나기 시작 했어. 언젠가는 신경이 조금 더 살아날 지도 모르니까 그 때를 대비해서 노력하리라는 거지. 그 생각으로 팔힘을 기르기로 했어. 실제로 이 팔힘만으로 작은 벽을 오를 수만 있다면, 결국에는 큰 벽도 오를 수 있는 거니까!”
그러고 보니 제이슨의 어깨와 팔은 전의 두 배로 울퉁불퉁 커져있었다. 난 잔잔한 어조로 또박또박 해나가는 제이슨의 애기를 들으면서 그가 한 없이 크고 견고한 바위처럼 느껴졌다. 그에 비해 나는 한없이 비겁하고 작고 초라하게 여겨졌다. 그렇지만 아무리 다시 생각해도 실제로 이는 실현 불가능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나는 제이슨 앞에서 내가 하려던 말을 차마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천근의 사슬에 묶인양 무거웠다. 돌아와서 생각에 생각을 거듭하지만 어쩔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며칠을 망서리다가 그에게 이메일을 썼다.
사랑하는 친구 제이슨!
미안하고 또 정말 미안하다! 이런말 정말 내키지 않고 하고싶지 않지만 네게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구나! 상처받고 웅크린 한마리 짐승처럼 난 지금 고통으로 신음하며 끙끙거리고 있다. 괴롭다! 무척 괴롭구나! 내 영혼은 지금 한쪽 날개가 꺽여 날지를 못해. 날개를 달아 훨훨 날고 싶지만 내 의욕은 이미 시들고 말라 죽어버렸어! 내 마음은 천근의 바위에 짓눌려있다.
예전처럼 생생하고 건강하게 소생시키고 얼어붙은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굴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 나는 산에 오르는 생각만 해도 끔찍해. 너를 돕고 싶지만 할 수 없어!. ! 참 비극이지만 난 정말 다시는 할 수 없어. 안돼!
제이슨 난 너를 존경한다! 난 오히려 네가 부럽다. 아니, 그렇게 말하면 안되지! 미안, 근데 도저히 옛날로 돌아갈 수가 없어. 그때는 참 좋았었는데! 괴롭다! 미안해! 아니 너를 돕지 못해서 미안한 게 아니라 이렇게 못난 모습을 네게 보일 수 밖에 없어 미안하다! 제이슨! 네게 친구라 말하기도 부끄럽구나!

메일을 써 놓고는 막상 보내려 하니 울컥 눈물이 핑 돌았다. 안되겠다! 아무리 그래도 그를 다시 만나서 최소한 얼굴을 보고 얘기를 해야지 이렇게 메일을 이런식으로 보낼수는 없다. 왜 내가 이리 약하고 못났을까? 약하지만 그래도 비겁하지는 말아야지! 얼굴을 보고 말하자!

*          *

“아니 그게 무슨 말이요 지금? 쥴리도 나를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요. 그런데 아무래도 결혼은 좀 더 생각을 해봐야겠어요.”
“무슨 생각을 더 해야 하는지 말해줄 수 있을까?”
크리스, 우리는 아직 만나기 시작한 지 사개월밖에 안됐잖아요? 너무 이른것 같아요.”
“아닌데, 내 생각에는 우리가 어린 나이도 아니고 이미 사개월이나 됐고 서로의 감정을 확인했으니 한 목표를 향해서 실질적인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무슨 다른 문제가 있을까? 나에 관해 알고 싶은 것이 있다면 무엇이나 물어봐요 내가 다 알려줄테니까”
크리스, 아무튼 그 얘기는 조금만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하기로 해요!”
그래? 그럼 쥴리! 난 당신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결혼 여부는 한발 물러나 기다리기는 할께요. 허나 나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는 말아요. 내게는 무척 고통스러운 시간이 될테니까!”

*          *
--  창 밖에 푸른 바다가 보였다. 창에는 흰색 반투명 커튼이 드리워 바람에 펄력이고 있다. 창밖 날씨는 화창하다. 저만치 바닷가 모래밭에 한 여인이 걸어가고 있다. 바람결에 날리는 긴 머리에 하얀 비치까운을 입고 속에는 주홍색 비키니 차림이다. “?키가 크고 머리가 긴 모습이 쥴리를 많이 닮았다. 반가운 마음에 자세히 보려고 커튼을 걷으려니 손이 닿자마자 커튼이 주르르 쏟아져 내린다. 이 커튼이 걷혀야 쥴리인지 확인할 수 있겠다고 조바심을 치며 두 손을 써서 부지런히 커튼을 잡아 내리나 커튼은 계속 내려와도 그치지를 않는다. 허우적대다가 문밖으로 빨리 나가서 쥴리가 사라지기 전에 확인하고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돌아서는 순간 거대한 검은 벽 앞에 서있다. 벽은 하늘이 보이지 않게 높다. 너무나 크고 높아서 좌우를 살펴봐도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오직 냉기를 뿜는 검은 벽만이 시야를 가득 채웠다. 막막한 절망감이 나를 둘러싸고 엄습하는 냉기로 몸이 얼어붙으면서 사지가 마비된 듯 꼼짝도 할 수 없이 숨이 콱 막히게 답답해졌다. 어떻게든 이 절망의 골짜기를 벗어나야겠다고 돌파구를 찾아 무진 애를 쓰다가 가까스로 깨어났다. - 
   이마와 등골에 식은 땀이 쭉 흘렀다. 다시 잠을 이루지 못하뒤척이며 곰곰이 생각해본다. 나는 여지껏 실패한 사고의 끔찍함만을 생각하며 그것을 망각의 바다로 밀어버리고 생각지 않으려 노력하며 지내왔다. 그래서 그를 멀리하고 만나기조차 꺼려해 왔다. 그런데 제이슨은 나보다 더 혹독한 고통과 암흑같이 참담한 상황속에서도 성공했던 정상에서의 기쁨만을 생각하고 그걸 붙들고 날마다 나와 함께 산을 오르며 지내왔다니! 그리고 이젠 그걸 다시 시도해보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니! 도저히 믿기지 않지만 그게 지금 엄연한 사실이. 그리고 나는 그 사실에서 눈을 감을 수도 달아날 수도 없다! 이 일을 어찌해야 하나! 그의 마음을 돌려놓을 좋은 방법이 없을까? 허나 누가 무슨 수로 그를 단념시킬 수 있을까? 아니 무슨 자격으로 그마저 말릴 수 있단 말인가?

*          *

티나에게서 마음을 정했냐는 독촉 전화가 왔었지만, 쥴리는 곰곰히 생각하니 티나가 하는 말이 너무 터무니 없었다. 그렇다고 그냥 간과할 상황은 아니었다. 일주일 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약속 없이 그녀를 찾아갔다. 그곳에 도착하여 차에서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그녀가 걸어와서 찻집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따라 들어갔다.
쥴리, 당신이 포기하면 아주 간단히 우리 모두의 문제가 쉽게 해결되는데 뭘 꾸물거리고 있어요? 순서상으로도 그렇고 아이 문제도 있잖아요! 상황을 모르겠어요?”
티나, 아이를 좀 보여줄 수 있어요?”
우리 아이를 당신이 왜 봐요? 그냥 포기하면 되지! 내가 거짓말 하는 거 같아요?”
맞아요. 티나! 내 눈으로 확인해야겠어요! 당신 말만 듣고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어요. 당신 말대로 크리스의 아이가 있다면 내가 크리스와 함께 그 아이를 책임지겠어요!”
안돼요!, 내 아이를 당신이 키운다구요?” 티나는 펄쩍 뛰면서 소리가 날카로워졌다.
누가 키우는가가 문제가 아니라 양육의 책임을 지겠다구요. 아무튼 아이를 보여주세요.”
오늘은 안되요.”
왜 안되죠?”
지금 없어요. 외갓집에 보냈어요. 그리구 당신은 우리 아이를 볼 필요가 없어요. 자꾸 이렇게 포기하지 않으면 나도 가만있지는 않을거예요.”
쥴리는 점점 더 티나를 믿을 수 없겠다는 심경이 확실해졌다. 찻집을 나와 티나의 집을 미행할 심산으로 차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저만치 걸어가는 티나에게 마주 달려오는 아이가 있었다. 티나는 주위를 살펴며 얼른 손짓으로 아이를 밀어냈다.
얘가 맞군요! 엄마 맞지?”
, 근데 아줌마 누구야?”
근데 이렇게 큰 아이가? 당신 악한 여자군요! 얘는 크리스를 만나기 전이잖아요?”
아니 얘는 …. 저기 내 말 좀…”
들을 필요 없어요!” 쥴리는 당황하는 티나를 싸늘히 훑어보고 떠나왔다.

*          *

사랑하면 눈이 먼다는데 쥴리는 오히려 눈 멀었던 나를 다시 볼 수 있게 만들었다. 오랜 고민 끝에 털어놓는 내 얘기를 긴 시간 듣고있던 쥴리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눈물을 닦으면서 물었다. “그 일이 위험한 일인가요? 아니면 힘든 일인가요?”
“아 물론 위험할 뿐만 아니라 또 역시 힘든 일이기도 하지!”
“아니 크리스, 내 말은 당신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무척 위험해서인가요? 아니면 엄청 힘드는 일이라서 인가요?”
“으음! 사실 준비만 철저히 하면, 그게 불가능하도록 무척 위험한 것은 아니지! 그보다는 불가능한 이유가 너무나 힘들기 때문이라고 해야겠지! 이건 정말 할 수 있다고 섣불리 말 할 수 없는 일이야!”
“그래요? 그렇군요! 불쌍한 크리스! 당신은 여태까지 트라우마의 울타리 속에 갇혀 있었어요! 한번 이렇게 생각해보세요. 그건 이미 다 지나가버린 기억 속의 허상일 뿐이죠!  이제 당신은 그 허상의 울타리 속에서 나와야 해요. 그렇다면, 이 일은 그 친구를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크리스 당신을 위해서 꼭 하는게 좋겠어요! 난 당신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어요. 만일 우리 사이에 아기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에게 어떤 선물을 줄 것인가?당신이 그 일을 해낸 이야기를 선물로 주실 수 있다면 더없이 큰 선물이 될 텐데요!”
내가 쥴리에게 했던 청혼을 그녀는 이렇게 승낙했다.

*          *

“야 제이슨! 너 참 대단해! 후유, 정말 대단하다!”
크리스 너 없으면 말짱 헛거지!” 제이슨은 땀을 닦으며 예의 그 소리없는 웃음을 싱긋 웃는다. 
나는 지금  열성으로 제이슨을 도와 등반 연습을 하고 있다. 장비들을 옮기고 설치한다든지 제이슨의 무감각한 발을 들어 올려 크랙에 고정시키는 일을 도와준다. 그렇게 다리의 무게를 덜어주면 발로 버티지 못하는 그는 팔의 힘만으로 바위를 끌어 잡아당겨 올라가야 한다. 이는 성한 사람 등반의 몇 배로 더디고 힘드는 일이다. 제이슨은 금방 비지땀을 뻘뻘 흘린다. 그래서 자주 쉬어야 하지만 그는 무서운 응집력으로 번번히 나를 놀라고 감탄하게 만든다. 이제 우리는 서로 선등을 고집하는 일은 없다. ‘나’는 더 이상 없고 ‘함께’만 있을 뿐이다.

   좌절해서 포기해버렸던 그 벽을 제이슨과 나 사이에 두고 있을 때는 절망의 깜깜절벽이던 그 거벽이 나란히 서서 함께 바라보는 지금, 보고 또 봐도 감탄을 자아낼 눈부시게 아름다운 위용으로 빛나고 있다.
우리가 올라야 하는 거벽은 언젠가 정복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제이슨은 성공의 희망을 이미 오래 전부터 붙들었고, 나는 쥴리와의 약속을 내 분신에게 반드시 선물해야 하니까!


- 끝 –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