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2일 일요일

마추야마 여행기 1 - Matchuyama ( Dogo Hot Spring)



여행중 아들 딸에게 보낸 매일의 소식들


첫째날

아직 살아있기는 한 거냐고?

그래. 걱정을 많이 했겠구나!

잘 도착했다!
그런데 사실은 어제 하네다 공항에서 한번 그리고 마추야마 공항에서 두번째 메세지를 너희에게 보냈는데 이곳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으며 보니까 메시지가 전송되지 않았더구나. 그래서 다시 메일을 보냈는데 아마 그것도 안들어갔나보다.

우리는 하네다에 새벽 4시 30분에 도착해서 두시간 반을 기다렸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마추야마에 아침 8 시에 도착했다. 마추야마 비행장에서 다시 버스로 도고에 도착한 것이 아침 아홉시경이었다.

버스 역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우리가 예약한 호텔의 위치를 물어보는데 한 재바른 택시 기사가 자기 택시를 타면 하루종일 타고 가고싶은 데를 다 가고 120불이라고 했다.  우리는 집을 떠난지 만 하루가 넘으니까 무척 피곤해서 빨리 샤워하고 쉬고 싶었지만 호텔은 오후 세시가 넘어야 체크 인이 가능했다. 그래서 그러기로 하고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서 짐을 맡기고 시내 관광에 들어갔다.


여기는 역사깊은 고도지만 시골 벽촌을 겨우 면한 작은 마을이다.
그래서 더욱 속깊이 일본적?인 일본사람들의 진면목을 잘 볼 수 있었다.
먼저 우리가 묵을 호텔 도고야는 크래딧 카드를 안 받고 로컬 현금만 수령한다고 했다.  호텔이 이 정도니 다른 곳에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한 우리는  당장 현금이 필요하니까  은행으로 가자고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여기에서는 '이요'은행이 제일 크다고 하며 한곳에 내려줘서  우리들 네명이 함께 들어갔더니 직원들의 눈이 커지면서 놀라는 눈치다. 자기네는 환전을 안하니 본점으로 가라고 해서 다시 나와서 본점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은 거의가 영어를 조금도 못한다. 아마 한국과 일본만 영어 배우기가 제일 어려운 것 같다. 다행히 온장로님은 일본어를 잘 하셔서 참 좋다.
본점에 가서도 돈을 바꾸는데 좀 어려움이 있었다.
무려 한시간이 넘게 걸려서 한 사람당 오백불씩만 바꿀 수 있었다. 한번에 한사람당 오백불씩만 가능하고 또 그것도 두번만 가능하다고 한다.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열흘이나 있으면서  호텔 숙박비까지 현금으로 내야 한다면 모자라기 십상이고 맘 놓고 즐거운 여행을 하기가 좀 어렵지 않을까 생각 되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으니 나중에 무슨 수가 생기겠지 하면서 그냥 오백불씩만 바꾸기로 했다. 
사람들이 무척 친절하고 예의 바른데도 대화 상통이 잘 안되고 돈 바꾸는 절차가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운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모든 절차는 단계마다 일일히 꼼꼼하게 기록하고 여러 단계의 상관에게 싸인을 받고나서 다음 절차로 넘어가고 그때마다 다시 싸인을 받으러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를 기다리게 했다. 우리가 가져간 돈을 위조가 아닌지도 물론 꼼꼼하게 한장 한장 확인을 했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돈을 받아보니 두사람씩이니 천불을 바꾸어주면 좋을 것을 오백불씩을 환율에 따라 바꾸니 동전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간단히 생각하고 동전을 다시 지전으로 바꾸어달라고 천원을 만들어서 주었다. 그랬더니 무진장 기다리게 했다. 알고 보니  다시 네사람의 서류를 새로 만들어서 얼마짜리 지전 몇장, 얼마짜리 동전 몇개를 계산하여 일일히 적으면서 복잡하기 이를데 없이 만들어가지고 다시 결재를 받느라고 배고프고 지친 우리를 한참 더 기다리게 만들었다. 정해진 절차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자기 임무에 충실한 면은 좋지만 한편 너무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환율도 무척 야박했지만 우리는 지치고 배도 고픈데 다른 선택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하네다 공항에서 돈을 바꾸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택시 기사가 데려다 준 곳에서 일본식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옷감 짜는 수제 직조 공장을 둘러보고 마추야마 성 (송산성 - 높은 산성으로 시내 한복판에 숲이 우거진  가파른 산  꼭대기에 오래된 화려한 건축물)을 다녀왔다



이곳은 오늘 가지 말아야 할걸!
케이블 카를 타고도 계단을 많이 오르고 내려야 했다.
물론 우리는 파김치가 되서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 먹을 생각도 없을 정도로 지쳤지!


숙소에 들어와서 목욕을 하고 걸어서 십분쯤 되는 곳에 가서 냄비 우동을 먹고 들어와서 와이파이를 연결 하고 보니 너희들이 잘 시간이더구나.  지금 한숨 자고나서 유카타를 입고 다다미방에 앉아서 이 메일을 쓰고 있다

동행한 장로님은 오기 바로 전에 감기가 걸려서 병원엘 두번이나  갔었고 자칫 여행을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었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 때문에 더 포기를 못 했겠지.

어제 무리를 했으니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온천하고 먹고 쉬려고 한다.

내일 보자!


셋째날

우리는 처음 동행한 장로님의 스케줄을 따라서 정한 도고야 료칸에서 사흘밤을 자고, 나중에 그 장로님이 화장실을 공동 사용 해야하는 것 때문에 변경한 이치야 호텔에서 나머지 6일은 함께 지내게 된다.

 도고야의 정문



관리를 최소한으로 줄인
일본식의 옆마당 모습



가옥의
뒷골목

이치야 호텔은 크고 현대식인데 도고야는 작고 낡은 오래된 일본의 전통식 건물이다. 처음에 이치야의 시설을 보고나서 도고야를 보니 낡고 후진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이 방에 딸려있지 않은 것도 참 불편했지만 무엇보다 온천이 아주 작고 볼품이 없었다.
그런데 하룻밤을 자고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다다미 넉장과 여덟장의 방을 터놔서 시원하게 넓고 나무를 많이 사용한 집 구조와 간결하고 소박한 실내장식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가볍게 여닫히는 미다지 문틀들도 기분이 좋다. 사면의 두 벽은 미다지 장지문으로 되어있어 꽉 막힌 벽 보다는 숨통이 트이는 편안함이 있으면서도 문 밖에는 복도가 있고  바깥 벽의 전면을 유리창으로 만들어서 햇빛과 시야를 가리지 않고 소음은 거르게 되어있고 보온도 되게 되어있다.
눈여겨 보면 문틀과 창살, 문고리나 잠금장치가 모두 작고 간결하면서도 성능이 우수하고 정밀하게 되어있어서  따로 어떤 장식품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스스로 곳곳의 자리에서 훌륭한 장식품이 되고 있다.


문틀위의 방의 구분선인데
간결한 일본식 문양을 넣어
단조로움을 피했다.


대나무 가지의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장식
둘러보다가 눈이 이런 곳에
머물면 즐거워진다.














우리가 자는 방은 이층인데  숙달되지않은 우리는 걸을때에 조금만 방심하면 쿵쿵 소리가 나면서 집 전체가 흔들리고 삐거덕 소리가 나서 지진이 난 것 같이 된다. 그래서 옆방의 사람들에게 미안하게 되니 절로 움츠리며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특히 유카타를 입어보니 가슴이 헤벌어지지 않도록 단정히 입으면 보폭이 좁아져서 흉내를 내지 않아도, 게다를 신지 않았는데도 절로 일본 여인들의 특이한 잦은 걸음걸이가 되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하룻밤을 자고도 정든 이유중의 또 하나는 무료로 제공되는 아침밥이다. 흰 쌀밥에 된장국에다가 반찬은 매실장아찌와 다시마채 , 그리고 손가락 두개 넓이의 김 몇 장이 다이고, 마실 것은 오차와 커피가 전부다. 그리고 모두 셀프 서비스이고 설거지도 자기가 해야 된다.


처음 이치야의 화려한 아침밥과 도고야의 아침밥을 사진으로 봤을 때에 도고야의 아침밥은 너무 초라해 보였고 더우기 밥을 많이 먹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어 보여서 실망했고 전혀 기대를 안 했었다
그런데 기름기 자르르 도는 흰 쌀밥은 반찬 없어도 자꾸 목구멍으로 넘어갈 정도로 맛있고 두부와 어묵, 다시마,  버섯과 양파가 넉넉히 들어있는 된장국은  푹 빠지고싶게 시원하고 좋았다. 게다가 다시마채 볶음이 흰 쌀밥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약간의 가미 양념된 파래김도 파삭하게 맛있고 평소에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매실 장아찌도 곰삭아서 맛있었다.
소박한 소찬이었지만 얼마나 정성이 많이 느껴졌는지! 그것도 공짜로 끼워 넣어주는 음식이!
내가 늘 음식을 하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먹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그런 음식 만드는 자세를 가져야 함을 더욱 새롭게 깨달았다.
살 찔 염려를 거두고 배가 부르도록 밥과 된장국을 두번씩  더 가져다 먹었다.
딱 두가지 반찬 

2015년 7월 4일 토요일

Brazil 여행기 5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깜깜하게 해가 져서야 이과수 Rafain Hotel에 도착했다. 객실이 여섯이나 여덟 개씩 붙어있는 이층건물이 널따란 잔디에 띄엄띄엄 늘어서 있었다. 분수대 앞 잔디에서 밝게 빛나는 남십자성을 바라보며 피자를 주문해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남미 여러 나라의 민속춤을 보러가려면 시간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과수 폭포의 명성으로 워낙 관광객이 많은 곳이라 쇼를 하는 장소가  엄청나게 컸다. 남국의 미남 미녀들이 원색의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와서  정열적인 선율에 열정적인 춤을 추는 것을 관람했다.

25일-
6시 30분 기상하여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상냥한 이과수의 가이드와 함께 버스로 알젠틴 국경을 넘어 이과수폭포를 보러갔다. 일명 악마의 목구명이라는 이 거대한 폭포를 보기 위해 강의 지류를 열개를 건너는 이어붙인 긴 다리를 건너던 중 일 미터는 됨직한 이구아나를 보았다. 물위로 들어난 바위에 엎디어 사람들의 눈총을 개의치 않고 졸고 있었다.
물은 깊지 않았으나 이십분이나 걸려서 건너온 넓은 강폭의 물이 우묵하고 둥그런 절벽으로 몰아 떨어져 내렸다. 폭포 주위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걷는데 거기서 솟아오르는 물보라로 우리는 온통 젖었고, 우뢰 같은 물소리로 귀가 멍멍해졌다. 구름사이로 숨바꼭질하는 강한 해를 따라 선명하고 고운 무지개가 여기저기 생겨났다.
다리를 다시 건너와서 오솔길을 따라 폭포 아래로 내려온 우리는 구명조끼를 입고 보트를 탔다. 보트는 우리를 태우고 폭포 가까이 다가가서 두 번이나 물보라 속으로 들어갔다가 돌아 나왔고 우리는 속옷까지 몽땅 젖었다.
첫 번째는 두려움에 움츠리고 눈을 감았으나 두 번째는 어차피 젖는다는 생각에 흠씬 즐겨보리라 마음먹고 소리를 지르며 눈을 뜨고 물을 맞으니 아주 재미있었다.
보트를 타고 하류로 삼십분 내려와서 앞뒤가 구분이 안되는 특이하게 생긴 트럭을 타고 열대 숲을 지나오며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성장이 빠른 굵은 대나무의 마디는 이십 인치도 넘을 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이과수 장로교회로 갔다. 정규모임이 있는 날이 아니라 그런지 현지인들이 좌석의 반쯤을 채웠고, 한인들은 많이 오지 않아서 섭섭했다. 어디에서나 누구든지 화려한 의상과 아름다운 선율의 하와이안 댄스에는 열광하는 모습을 보였다.

26일-
오늘은 이과수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새벽 5시 30분에 기상하여 가방을 꾸리고 check out. 브라질 폭포를 관광했다. 이과수 폭포의 메인폭포가 되는 악마의 목구멍은 지리적으로는 알젠틴에 있다. 그런데 알젠틴에서 수평으로 내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브라질 쪽에서 병풍을 바라보듯 입체적으로 감상하는 광경은 입을 다물 수 없도록 장관이었다.
폭포는 몇 마일에 걸쳐 있어서 폭포를 따라가며 계곡을 사이에 두고 숨바꼭질하며 오솔길을 걷노라면 수없는 폭포가 새로운 그림으로 다가왔다. 넓고 큰 폭포도 있고 가늘고 아기자기한 것도 많았다. 한 번에 떨어지기보다 지층의 단계를 이루어 이층 삼층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제 폭포를 다 구경 했나?라고 생각하면 모퉁이를 돌아가면 더 큰 규모의 폭포가 나와서 보는 사람을 새록 새록 감격하게 했다.
점심 후에 새 공원으로 갔다. 여러 종류의 열대지방 새들이 알록달록 원색으로 예쁜데 너무 커서 귀여운 맛이 적고 좀 무섭기까지 했다. 상냥하던 이과수의 미녀 가이사를 작별하고 3시 30분 발 비행기로 쌍 파울로 향했다. 많은 정보를 갖고 성심껏 설명하는 가이드를 우리는 의사, 변호사와 같이 가이사로 부르기로 했었다.
이과수 비행장에서 우리는 쌍파울로 가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지만 짐은 직접 로스앤젤레스로 부친다고 했다. 우리의 모든 짐을 부치는데 시간이 참 오래 걸렸다.
잠자리를 바꾸면 잠을 잘 못자는 나는 떠나기 전날부터 잠을 설쳐서 피곤했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나는 깜빡 졸았다. 눈을 뜨니 허전한 느낌이 확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늘 목에 걸고 다니던 주머니가 없다. 의자 밑에 떨어뜨렸나? 엎드려 찾아보니 없다. 캐비닛에 올려놓았던 짐을 꺼내어 찾아봐도 없다. 비행기는 이미 떠서 날고 있고, 눈앞이 캄캄했다. 거기에는 면허증과 크레딧 카드, 썬 그래스, 카메라, 현금 사백불이 들어있었다.
할 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며 모든 일정을 주관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된 박 목사님에게 말씀드렸다. 쌍 파울 공항에 내려서 이리 저리로 박 목사님을 졸졸 따라다니며 분실신고를 하고 기다렸다. 우리 모두는 거의 찾을 수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내 가방이 이과수 공항, 스크린 체크하는 곳에서 발견 된 것이 전화로 확인되었다. 쌍파울 공항에서 엘에이 비행기를 타려면 우리는 여섯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항공편이 없어 당일 찾을 수는 없었다. 면목 없지만 박 목사님께 부탁을 드릴밖에. 다행히 감사하게도 오월 일일에 LA.에 오시는 오 목사님 편으로 전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쌍파울 공항에 누군가가 “아! 이제 또 밥 안 해먹는 곳, 어디 갈 데 없을까?”라고 말하여 모두가 까르르 웃었다.

27일-
평소에 소소한 일들을 자주 잊는 나는 스스로 은근히 걱정하던 차에 이번일로 마음이 내려앉듯 무거웠다. 점점 무능력자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쌍 파울에서 밤 열두시에 출발하여 (비행시간 열 세시간) 다음날 아침 여덟시 십오 분에 로스안젤레스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남편은 나에게 얼굴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동안 볕에 타기도 했고, 또 피곤하기도 했고, 화장도 지워졌으니까 그럴 테지만 나는 야단맞을 일을 대비하여 엄살을 부렸다. “반쯤 죽었다 살아서 그래”라고 말하고 분실사고의 자초지종을 얘기 했더니 살아서 돌아온 것만 고맙고 좋단다.

눈을 감으니 꾀죄죄한 파라과이 원주민 어린이들의 커다란 눈망울이 떠오른다. 철저한 무관심과 소외 속에서 소망 없이 살아가야 할 저들에게 다가가, 사랑을 베풀고, 소망을 안겨주려고 눈물을 바치는 해맑은 젊은 선교사의 얼굴도 보인다. ‘어린이여 일어나라!’ ‘젊은이여 일어나라!’ 고 외치는 함성이 남쪽에서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            060501

 악마의 목구멍


 흠뻑 젖어서도 밝은 웃음들을




 엉덩이 말리기










 이과수 장로교회에서

 누구나 좋아하는 하와이안 댄스

           폭포를 뒤로하고



2015년 7월 1일 수요일

Brazil 여행기 4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23일-
오늘은 조동진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아순시온 장로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어있다. 오늘 그 교회의 기도원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여 버스로 한 시간을 달려서 시온기도원에 도착했다. 예배 중간에 평복차림으로 우리가 성곡을 네곡 불렀다. 교인이 성인만 백여 명이 되었다.
기도원은 이십 에이커가 넘는다 했다. 성전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남녀 숙소가 길게 이어져 있고, 식당과 친교실 외에 부속건물이 몇 개 더 있었다. 나무숲이 있는 구릉 뒤로 묘지까지 딸려있다고 했다.
파라과이에 한국 사람들이 많았을 때엔 교회도 부흥하여 이렇게 큰 기도원을 마련하고 활발히 신앙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사업에 크게 성공하여 쉽게 사업을 거두지 못할 형편이거나, 아주 가난하여 길이 없는 사람들만 남아있고, 중간층의 사람들은 브라질, 한국, 캐나다,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예배후 교인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 예배를 위해 어제의 반대색으로 드레스를 입고 양창근 목사님이 섬기시는 람바레 현지인 교회로 갔다. 작년에 있었던 교통사고의 참사로 인한 분쟁으로 항의 시위가 정문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했다.
우리는 버스를 뒷마당에 대고 뒷문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는데, 앞쪽에서 무슨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무겁고 낯선 곳에서 느끼는 약간의 공포심도 생겼다.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집회가 시작되자 그들의 뜨거운 찬송과 열정적인 메시지는 민족성과 선교지라는 의식을 더욱 치열하게 느끼게 했다. 우리는 성가 여섯 곡과 핸드벨, 가곡 한곡, 그리고 하와이안 댄스로 끝마무리를 했다. 후에 양창근 목사의 사모님이 초대하는 숯불구이로 마음이 편치 않을 만큼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우리는 보답으로 식사 후에 반주 없이 즉석에서 ‘오빠생각, 낮에 나온 반달, 고향의 봄’을 함께 불러드렸다.

24일-
새벽 다섯 시 반에 기상하여 짐을 꾸리고 아침을 든든히 먹고 다시 버스로 이과수로 출발했다. 여섯 시간을 가야 할 참이다. 파라과이에서는 제일 좋은 호텔이어서 힐러리 여사도 묵고 갔다는 좋은 곳을 우리는 별로 즐길 새 없이 떠나는 아쉬움이 조금 있었다.
쌍 파울에서 속을 썩이던 전화카드는 여기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는 컴퓨터실이 그냥 오픈 돼있어서 자유로 이 메일을 집으로 보낼 수 있었다. 쌍 파울에서는 통화는 못했는데도 호텔을 나오면서 통화료를 십 일불을 주어야 했다. 국제통화를 시도하면 연결이 안 되어도 로컬통화요금은 시도할 때마다 부과된다고 했다. 어처구니 없지만 말도 안통하고 내 기분과 시간만 아까우니 그냥 줘버렸다.
파라과이는 인구의 칠십 펴센트가 여자라 했다. 그런데도 젊은 남자는 자꾸 다른 나라로 빠져나간다했다. 교육이 부실하고 직업이 없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남자가 아주 귀하여 모든 노동을 여자들이 하고 남아있는 남자들은 그냥 놀고먹는 천국이란다. 자원은 많으나 위정자들은 부정부패로 물들어 있고 산업이 없으니 일자리도 없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라고 했다. 그러니 가난을 면할 길이 점점 더 없어보였다.

어제 갔었던 교회의 양창근 목사님은 이십여 년 전부터 원주민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었다. 작년에는 'Ariba Ninos(어린이여 일어나라)' 라는 주제로 전국적인 선교대회를 열었다. 양 목사님이 가르쳐서 선교지로 나간 선교사들의 각 지역 어린이들 팔천 명을 초대하여 대회를 치뤘다고 하니 그 사역의 열매가 얼마나 방대한지 알만 했다.
정부의 무관심속에 버려져있는 어린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앞날의 소망을 심어주는 일들을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여행할 때는 잘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기도 했지만 파파야가 달고 향기롭다고, 커피가 진하고 맛있다고, 복숭아 주스가 신선하다고, 욕심껏 먹었으니 뻔하지 않은가. 근데 문제는 도중에 들를만한 화장실이 없는 거다. 있어도 여러 사람이 볼일을 다 보려면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옷을 화장실 안에서 단정히 입고 나왔다가는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혼쭐이 났다. 남자 화장실도 금새 여성전용으로 바뀌고, 어쩔수 없이 목사님은 남자 화장실 앞의 보초임무를 마다하실 수 없게 되었다.

파라과이 한국학교 강당에서다. 연주하는 도중에 며칠을 애 먹이던 소식이 갑자기 왔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연주를 끝내고, 화장실을 찾아서 어둠 속에 치렁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달음질을 치는데 하필 그곳은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건너서야 화장실이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겨우 급한 고비를 넘기고 보니 종이가 없는 거다. 대책 없이 멍하고 있는데 때마침 구세주가 나타났다. 혼자서도 넉넉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사이좋게 알뜰하게 처리했다. 그런데 나와 보니 수도는 있는데 물도 안 나왔다.

 나중에 이 가방을 잊어 버렸음

 강변의 빈민가와  붉은 흙

시온 기도원

 민속 공연

 민속공연 

노변의 묘지
묘석을 작은 집모양으로 


2015년 6월 27일 토요일

Brazil 여행기 3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시내로 내려와 그 유명한 코파카바나 해변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해변에 나가 발이라도 담그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으나 일정을 맞추려면 그럴 시간이 없었다.
빵지아쑤까로 갔다. 아쑤까는 설탕이란 말이고 보면 sugar bread 라는 말이다. 바다로 향하여 길게 나간 산 끝자락에 불란서 빵을 반으로 뚝 잘라서 세워놓은 것 같은 한 덩어리의 큰 돌산이었다. 이곳을 케이블카로 올라가는데 우선 빵산에 연이어 있는 산을 올라가서 다시 빵산 위로 올라가게 되어있다. 이 케이블카는 높기도 하고 길기도 했다.
저만치 서로 마주 보이는 꼴꼬바도(예수 상)에서와 같이 이곳에서도 항구가 내려다 보였다. 맑은 바다의 푸른 물빛과 들고나는 오밀 조밀한 흰 모래의 해안들, 저만치 바다 가운데 우뚝우뚝 솟은 돌산, 푸른 숲과 어우러진 하얀 별장들, 안으로 들어온 만을 이어붙인 긴 다리, 숲이 우거진 작은 섬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져서 참 아름다웠다. 세계 삼대 미항중의 하나라는 명성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21일-
아침 여섯시 반에 기상하여 짐을 꾸리고 아침을 먹고 호텔을 나와서 공항으로 갔다. 이과수(비행시간 한 시간 삼십분)에 도착하여 이태리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버스로 파라과이로 떠났다. 산이 없는 숲과 초원을 여섯 시간을 달렸다. 모두 피곤하고 잠이 부족하고 또 배부른 후라서 골아 떨어졌다.
시골길엔 가끔씩 나타나는 마을이 초라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푸른 초원의 흙은 황토였는데 오히려 붉은색에 가까워서 적토라 해야 더 맞았다. 때때로 여기 저기 무덤의 봉분 비슷한 모양의 빨간 흙더미가 크고 작게 늘어서 있는 모양이 특이했다. 이것은 개미집이라 했다. 어떤 것은 사람의 가슴정도까지 올라올 정도로 높았다. 여기는 비가 자주오고 또 더우니까 물도 피하고 더위도 피하려고 개미가 이렇게 집을 짓는다는 거다.

아순시온의 부녀회에서 대접하는 저녁을 한식으로 먹었다. 고운 연두색의 보드라운 상추가 얼마나 예쁘던지 내 룸메이트는 여기에 와서 상추 심어먹고 살면 더없이 좋겠다고 말했다.
Asuncion Yacht Club & Resort에 늦게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파라과이에서는 국가 원수 급의 내외 귀빈이 묵는 호텔이라고 했다. 늦었지만 컨퍼런스룸에 모여 일행이신 조학산 목사님의 말씀으로 예배를 드리고 열한시에 각방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늦었고 또 하루 종일 앉아만 있었던 나는 룸메이트와 뜻이 맞아 수영장에서 몸을 좀 풀 생각으로 수영장을 찾아 나섰으나 수영장은 야외 풀이었고 물을 덥히지 않아 차가웠다. 집에서 같으면 그냥 해도 좋을 만 했지만 룸메이트가 겁을 내었고 나도 조심하는 차원에서 그만두기로 했다. 돌아오다가 로비에서 인솔자인 김 장로님 내외를 만났다. 이곳에서 사업을 크게 일구고 성공하여 잘 사신다는 친구 분이 함께 있었다.
그 분 말씀이 옛날엔  많던 한국 사람들이 지금은 칠십 프로는 떠나고 없다고 했다. 브라질이나, 한국, 또는 미국으로 길이 닿는 대로 떠났다 한다. 이곳의 이세 아이들은 스페니쉬는 물론이지만 한국말과 영어를 아주 잘 한단다.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너희들은 어떻든지 여기를 떠나야 한다고 열심히 가르치고 아이들도 그렇게 알고 배운다했다. 이 나라에서는 교육도 부실할뿐 아니라  정부의 부패가 심해서 앞날의 희망이 없기 때문이라 했다.

22일-
아침 8시에 기상하여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양창근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원주민 교회 Centro de Vida를 먼저 방문했다. 이십여 년 사역의 열매로 번듯한 교회건물과 신학교가 붙어있었다. 여기서 교회를 돌아보고나서 잠시 이 교회의 사역을 위하여 기도하고 다른 원주민교회 한곳과  주말에만 하는 토요학교를 방문했다.
버스가 한대 겨우 지날만한 비포장도로로 어렵사리 다녀야했다. 토요학교에서는 마침 백 명 가까이의 어린이들이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나무 그늘 밑에 평상과 같은 식탁에 앉아서 접시에 담긴 큰 고기 덩이 하나와 쌀이 좀 들어있는 스프를 먹고 있었다. 토요일과 일요일 양일의 일 년 회비가 식비 포함하여 백 불 이라는데 돈이 없어 참가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아이들 중에는 맨발인 아이도 더러 있었다.
열악한 환경의 일선에서 피부에 부딪치는 역경들을 사명감으로 감당하는 선교사들의 노고에 깊은 감명을 받고, 나약하고 안일한 우리의 모습에 양심이 찔리고 아팠다.

저녁에는 아순시온 한국학교 강당에서 교민 위안의 밤을 갖었다. 우리 일행 중 두 명이 깜빡 잊고 쌍 파울 호텔에 드레스를 그냥 걸어두고 왔기 때문에 논의 끝에 가운데는 검은색, 가장자리는 코랄색 드레스를 섞어 입었는데 오히려 더 보기 좋은 결과를 낳았다.
여기서는 더욱 진한 마음의 환대를 받고 천사의 음성이라는 칭송까지 받으니 오히려 부끄러운 마음이 많이 들었다. 그만큼 그들에게 한국적인 정서가 그리웠음을 넉히 짐작할 수 있었다. 시간이 늦었지만 조별로 기도회를 갖고 헤어졌다.

양창근 목사님 교회

 교민 위안의 밤

 토요학교 점심시간 

주방 봉사자와 함께

람바레교회에서 찬양

2015년 6월 10일 수요일

Brazil 여행기 2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브라질 사람들의 자존심은 축구와 삼바와 예술에 있다한다. 특히 건축예술은 상당히 발달된 편이라 아름다운 건축물이 상당히 많았다. 이는 세계적인 명성의 건축가가 있기 때문이라 했다.
새 수도, 브라질리아를 그의 설계로 조성했다는데 지금은 칠순이 넘으신 분이라 했다. 그가 설계하여 지은 유명한 현대식 건물의 성당으로 갔다. 피라미드형의 높은 탑 모양으로 지은 건물은 긴 사다리꼴의 팔면체로 되어있었다. 네 면은 넓고 네 면은 좁은데 좁은 부분은 세로로 길게 스테인드 그라스로 돼있었다.
성당에 들어서니 광장만큼이나 넓은 성당에 사면으로 까마득히 높은 천장에서부터 땅에까지 스테인드 그라스로 투영된 오색의 은은한 빛이 어두운 성당을 밝히고 있었다. 성당의 중심부에 좁은 천장은 십자모양으로 자연 채광이 되도록 설계되어있었다. 한눈에 모든 중심을 위로 향하여 까마득히 높은 천정의 밝은 십자가에 모아지도록 설계된 것이 메시지가 뚜렷이 드러난 훌륭한 작품으로 보였다.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 소집시간까지 한시간반정도의 여유가 있었다. 시차가 있어 여기는 네 시간이 빠르므로 잠자는 시간이 부족해서 피곤했다. 그러나 여행 첫날이라 나는  약간 들떠 있어서 방에 들어가 쉬지 않고 몇명의 동료들과 호텔 앞에 있는 큰 공원을 산책했다. 잘 손질되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군데군데 조각품들도 있고 작은 연못도 있다. 키가 큰 나무들이 하늘을 가려서 한낮인데도 서늘했다. 중국마켓이나 태국마켓, 또는 한국마켓에서도 본적이 있는 두리안이 높은 나무에 열러있는 것을 보았다. 먹어본 적은 없다. 구린내가 나지만 맛은 더할 수 없이 맛있다는 얘기를 들었었다. 고개를 젖히고 올려다보지 않았다면 몰랐을 높은 위치에 사람 머리통만한 크기로 달려있는 게 신기했다. 만일 모르고 지나다가 떨어지는 두리안에 맞으면 영락없이 죽을 수밖에 없겠다는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브라질에서는 쌍 파울에 한국 사람들이 제일 많이 살고 있고, 쌍 파울 동양선교교회는 쌍 파울에서 제일 큰 교회다. 우리가 갖고 온 두벌의 드레스 중에 까만 드레스를 입고, 연습하기 위해 미리 도착했다. 넓고 큰 교회건물은 장식이 별로 없는 창고식의 건물이었다. 오늘은 수요예배로, 성도가 백 오십여 명이 모인 가운데서 우리가 찬양을 했다. 성가를 여섯 곡, 핸드벨, 가곡을 세곡, 고향의 봄의 순서로 진행 되었다. 고향의 봄을 부를 때에는 성도 중에 눈물을 닦는 사람이 많이 보였다. 우리들도 코끝이 찡 하고 가슴이 뭉클하고 뜨거운 눈물이 솟구쳤다.
순서를 끝내고 아홉시가 넘은 시각에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원래 브라질 식은 아홉시가 넘어서야 식당이 붐비기 시작한다고 한다. 낮이 뜨겁기 때문에 낮잠 자는 시간이 공식적으로 있고 저녁은 늦게 먹는 풍습이란다.
쌍 파울 교회의 어떤 장로님의 초대로 브라질 바베큐 식당에서 화려한 저녁을 푸짐하게 먹었다. 고기는 소, 돼지, 양, 닭의 고기를 부위별로 긴 쇠꼬치에 꿰어서 구은 것을 제복을 입은 종업원이 식탁을 돌면서 즉석에서 원하는 만큼 무제한 잘라주는데 기름이 없고 연했다. 야채는 보드랍고. 과일은 달고 향기로웠다. 낙농이 발달한 곳이라 후식이 모두 맛있고 훌륭했다. 모두 배를 두드리며 과히 먹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즐겼다. 그런데 밖에 나와서 보니 15.75 헤아스라는 간판이 보였다. 미국 돈으로 8불정도이다. 여기에 음료수와 후식은 따로 계산된다. 그래도 미국에 비하여 삼분의 일 가격인 것 같았다.

20일-
새벽 다섯 시 기상하여 호텔에서 든든히 아침식사를 하고(“아 파파야! 정말 맛있어!”) 버스로 비행장으로 떠났다. 대도시라서 출근시간은 혼잡했고 또 일방통행로가 많아서 시간이 많이 걸렸다.
Rio de Janeiro (항공시간 한 시간 십분)에 도착하여 현지 가이드가 대기해 놓은 버스로 꼴꼬바도(예수동산)으로 갔다. 한쪽은 경사지고 다른 한쪽은 절벽으로 되어있는 높은 산 위에 십자형으로 팔을 벌린 거대한 예수의 상이 세워져 있었다.
이 산의 경사진 쪽으로 우리는 기차를 타고 삼십분 정도 S자로 구불구불 숲 속으로 올라갔다. 우거진 열대림을 지나면서 식물원이나 화원에서만 보던 트로피칼 플랜트들은 꽃도 크고 잎도 연하게 무성히 자라고 있었다. 몇 개의 역을 거치면서 원주민으로 보이는 흑인들이 한둘씩 합류해가며 그들의 특유한 장단으로 원주민의 생음악을 연주하고 노래했다. 일행 중에 멋쟁이 수잔 언니가 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며 모자를 들고 다녀서 꽤 많은 팁을 마련해 주었다. 우리는 대부분이 손자들이 있는 할머니들이다. 그럼에도 나이는 꽁꽁 묶어서 집에 두고 왔는지 수잔 언니의 익살스런 춤에 세상모르는 어린애들처럼 숨넘어가게 웃었다.
절벽 위에서 예수는 팔을 양쪽으로 벌리고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얀 돌조각으로 모자이크 하여 쌓아올린 압도적으로 거대한 돌상이다. 받침대 부분은 십여 명이 미사를 드릴 수 있는 작은 성당이다. 일 년에 한 번씩 이곳에서 미사를 드린다했다.
예수 석상은 너무 커서 카메라에 다 넣기가 힘들었다. 원래 이곳은 경치가 좋아서 힘 있는 자들의 환락을 위한 장소였었다고 한다. 캐토릭 국가인 브라질은 너무나 부도덕하고 마약과 환락에 빠진 이 도시사람들에게 메시지를 주기 위해서 사방 어디에서도 잘 보이는 이 자리에 삼년에 걸쳐 예수상을 세웠다 한다. 실제로 밤이나 낮이나 도시 어디에서도 보이는 이 예수상이 서고부터 범죄율이 이십 퍼센트가 줄었다고 한다. 여기서 리오 데 자네이로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는데 사면팔방 어디를 보아도 한 폭의 그림과 같이 아름다웠다

시내로 내려와 그 유명한 코파카바나 해변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해변에 나가 발이라도 담그고 싶은 마음이 꿀떡같았으나 일정을 맞추려면 그럴 시간이 없었다.

빵지아쑤까로 갔다. 아쑤까는 설탕이란 말이고 보면 sugar bread 라는 말이다. 바다로 향하여 길게 나간 산 끝자락에 불란서 빵을 반으로 뚝 잘라서 세워놓은 것 같은 한 덩어리의 큰 돌산이었다. 이곳을 케이블카로 올라가는데 우선 산에 올라가서 다시 빵산 위로 올라가게 되어있다. 이 케이블카는 높기도 하고 길기도 했다.
저만치 서로 마주 보이는 꼴꼬바도(예수 상)에서와 같이 이곳에서도 항구가 내려다 보였다. 맑은 바다의 푸른 물빛과 들고나는 오밀 조밀한 흰 모래의 해안들, 우뚝우뚝 솟은 돌산, 푸른 숲과 어우러진 하얀 별장들, 안으로 들어온 만을 이어붙인 긴 다리, 숲이 우거진 작은 섬들,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져 참 아름다웠다. 세계 삼대 미항중의 하나라는 명성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쌍파울로 교회에서 찬양

성당


 꼴꼬바도에서 내려다본 리오의 전경

리오의 다른쪽 전경
 예수동산의 예수상

예수상의 받침대 안의 성당




2015년 6월 9일 화요일

Brazil 여행기 1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4월 18일 2006

오후 두시 오 분 Varig 항공사의 비행기로 출발하기위해 로스안젤레스 국제공항에 열한시까지 모였다. 합창단원 서른아홉 명에 이 여행에 동참하신 남편이 네 분, 합하여 마흔셋이다.
남미 선교 순회공연이라지만 단원 중에는 교인이 아닌 사람도 더러 있고, 선교 반 여행 반의 목적이다.
일주일 전부터 소소한 것들은 준비했고, 떠나기 전날 대강의 짐을 꾸려두었는데도 새벽 네 시에 잠이 깼다. 잠을 좀 자둬야 할 것 같아서 눈을 꼭 감고 뒤채는데 어렸을 때 소풍 가는날같아 다시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다섯 시가 조금 지나 일어났다. 세면도구까지 마저 다 챙겨서 가방을 싸고는 아침을 먹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시간이 세시간정도 남았다.
일정표에 보면 이과수에서 파라과이로 갈 때에 버스로 다섯 시간을 이동한다고 되어있었다. 짐작컨대 많이 지루할 것 같았다. 인터넷에서 좀 재미있는 것을 꺼내볼까 하는 마음으로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데 평소에 잘도 눈에 띄더니 찾으려니까 잘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또 옮길만한 것들을 찾기가 힘들었다. 결국 쓰레기만 눈이 팽팽 돌도록 헤치다가 얼마 안 되는 유머를 프린트해서 가방에 찔러 넣었다.
꼭 자기가 직접 데려다 주겠다고 고집을 부리며 새벽에 나간 남편이 시간이 다 돼오는데 나타나질 않았다. “공경이 체증 돋운다나?” 풀 방구리 생쥐 드나들 듯 자꾸 문밖을 내다보는데 내게 약속한 시간에서 십 분쯤 늦게 남편이 나타났다. 그래도 고마운 마음에 나무라지 않고 짐을 싣고 떠났다. 그런데 이게 웬일? 후리웨이를 타자마자 막히는 게 아닌가? 조바심이 일었지만 남편이 미안해할 것 같아 잠자코 있다 보니 아무 이유도 없이 다시 뚫렸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또 막혔다.
“아무래두 늦겠다 그치?” 
“염려 마, 조금만 더 가면 카 풀 레인으로 가면 돼” 그런데 얼마쯤 가다보니 카 풀 레인까지도 막혀버렸다.
“이러다 비행기 못타는 거 아냐?”
“안가면 더 잘 됐지 뭐” 
원 세상에! 그렇게 같이 가지고 조를 때는 자기는 전혀 가고 싶지 않다고 시치미를 뚝 떼더니, 약 오르게 이런 때에 이렇게 속마음을 표현하다니!
결국 나는 속을 까맣게 태우고 삼십분 늦게 꼴찌에서 두 번째로 도착했다. 

공항은 무척 붐비고 복잡했고 오래 기다려서야 검표하고 짐을 부치고 나서, 합창단에서 준비해온 김밥을 공항 안 음식코너에서 먹었다. 줄의 끝에 있던 나는 시간이 없어서 선 밥을 겨우 면한 모래알 같은 김밥을 꾸역꾸역 물과 함께 넘기고 비행기를 탔다.
우리 일행은 비행기 뒷좌석에 몰려 있었다. 그 중에 내 좌석은 맨 뒤에 화장실 옆이다. 비행기가 떠나기 전부터 화장실냄새가 풍겨나왔다. 기내식은 좋았으나 음료수는 오렌지 쥬스와 도마도 쥬스, 콜라와 브라질산 소다수(과라나)로만 제한되고, 브라질 식 커피와 티가 있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Varig 항공사는 문제가 있어 파산 중에 있다고 했다.

19일-
비행시간 열세시간 반이 걸려서 새벽 다섯 시 사십 오 분에 브라질 쌍 파울에 도착했다. 여름이 막 지나고 가을이라는데 새벽인데도 여기보다 덥고 습기가 있었다. 이제부터 모든 일정을 함께할 박지웅 목사님을 만나서 버스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아침 출근시간이라 좀 시간이 걸렸다. 잘 구획되지 않은 도로 사정이나 관리가 소홀해 보이는 상점들이 경제적으로 뒤떨어진 상태를 한눈에 짐작케 했다.
여덟시가 지나서 Luz Plaza 호텔에 도착하여 호텔 식당에서 아침부터 먹었다. 음식은 대체로 맛이 있었고 특히 파인애플과 파파야가 하와이에서처럼 맛이 있었다. 누군가가 변비에 좋다고 말하여 나도 파파야를 욕심껏 많이 먹었다. 여행 중엔 언제나 잠을 잘 못자고 또 변비로 고생하기 때문이다. 
박 목사님은 현지의 돈을 두둑이 준비해 와서 필요한 돈을 바꿔주었다. 남은 돈은 돌아갈 때에 다시 바꿔주겠다고 약속하여 나도 백 불을 바꿨다. 환율은 2.1대 1 이었으나 이백 헤아스로 계산되었다. 남편이 아무것도 사오지 말라고 여러 번 당부 했지만 그래도 쓸 일이 왜 없겠는가? 여덟 명의 조장이 된 나는 조원과 함께 쓰려고 전화 카드도 십 오불을 주고 하나 샀다.
점심시간에 다시 모일 때까지 시간이 좀 있었다. 우선 짐을 풀어 샤워하고, 오늘과 내일의 시간표를 살핀 다음, 집에 전화를 걸었다. 통화카드를 이용하여 처음으로 전화를 걸어본다. 절차가 복잡하여 여러 단계의 많은 번호를 눌러야 했다. 카드를 살 때에 들었던 사용법으로는 안돼서 호텔 측에 물어서 해 보는데도 잘 되지 않았다. 다이얼이 너무 늦었으니 다시 시도하라는 녹음이 자꾸 나왔다. 이 카드는 네 시간짜리인데 이상하게도 룸메이트의 전화번호로 걸면 세 시간 삼십분이 남았다 하고 내 전화번호로 하면 이십 칠 분이 남았다고 하면서 똑같은 녹음만 나왔다. 결국 변변히 쉬지도 못하고 전화도 못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의 국제통화번호를 후론트에서 잘못 가르쳐준 때문이었다.
쌍 파울 시내에 있는 한식집(해운대)에서 로스구이와 불고기, 된장찌개와 김치찌개로 점심을 먹었다. 구수하면서도 토속적인 맛이 일품인 된장찌개와 보드랍고 연푸른 상추가 특히 맛이 있었다. 점심 후에 시내관광을 하고 저녁에는 쌍 파울 동양선교교회에서 공연을 하게 되어있었다.
버스를 타고 시내를 돌면서 중심부에 있는 시청과 역사적인 건물인 대 성당과 공원을 둘러보았다. 하얀 석조건물이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공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붐비고 있었고 노점상과 약장수를 연상시키는 무리도 보였다. 여기서는 절대로 혼자 다녀서는 안 된다고 했다. 관광객 차림으로 카메라를 메고 있으면 달려들어 그냥 뺏어가는 무시무시한 사례도 있다고 했다.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버스에서 내리지 않았다. 각 나라의 상사, 지사와 대사관들이 몰려있는 거리에는 독특한 아름다운 빌딩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대부분의 건물이 페인트가 돼있지 않았다. 그냥 시멘트의 회색으로 돼있고, 오래된 것은 때가 끼어 검은 얼룩이 진 상태로 있어, 도시의 색이 대체로 우중충한 분위기였다. 건물을 그렇게 멋있게 지어놓고도 관리차원에서 경비가 들것을 고려하여 아예 처음부터 페인트를 하지 않는다 했다.
이월 중순부터는 한 달간을 삼바축제로 모든 행정이 마비된다 했다. 삼바축제장은 후리웨이 팔차선 정도의 포장된 통로를 사이에 두고 경기장 모양의 높은 스텐드가 창고 같은 삼층 건물과 함께 직선으로 까마득하게 길게 늘어서 있었다. 해마다 주제를 발표하고 그에 따라 선발대회를 하는데 한 번에 한 팀의 인원이 사천 명이라 하니 그 규모가 짐작이 안가게 어마어마했다. 그러니 전국에서 몰려온 참가자의 인원만으로도 붐비고 복잡할 수밖에. 여기서 우리는 찬란하고 기괴한 갖가지의 삼바의상을 이불 또는 삼불을 주고 빌려서 입고 사진을 찍었다.
삼바의 나라인 브라질은 또한 축구의 나라이기도 하다. 축구장으로 가서 미국 할리우드에 있는 명성의 거리처럼 유명 축구선수의 발 모형을 찍어놓은 곳을 보았다. Ronaldo Luiz Nazario de Lima 라는 긴 이름과 함께 찍힌 호나우도 선수의 발모양도 보고 펠레 선수의 것도 보았다. R 이 처음 나올 때는 하 발음이 되고 L 은 우 발음이 되어 그렇다 했다.

축구장 앞에서

호나우도의 발모양

삼바 축제장에서 
의상들을 덧입고 무더위에도 함박웃음을

남국의 공주 같은 정미 길슨씨
삼바 축제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