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3월 25일 월요일

놀랄 일도 아닌 일


  
   컴퓨터의 데스크 탑에 널려있는 아이콘들을 정리하다가 뜬금 없는 제목 나는 아주 오래 오래 살고싶다를 발견했다. 순간, ? 내가 이런 제목의 글을 썼던가? 이미 여기 저기서 사그랑대는 몸으로 오래 산다는 것을 난 오히려 끔찍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일순간이나마 어떤 생각으로 이런 제목을 달아놓았는지 도무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얼른 화일을 열어보니 백지여서 허망해 잠시 멍해졌다.

   백세시대라는 요즘 인간의 평균 수명이 백년 전에 비하면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어났다. 지금은 환갑을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지만 예전부터 한국에선  환갑에 대소가가 모여 마을의 큰 잔치로 축하를 했다. 한 세기 전엔 서양에서도 결혼식에 양가 부모가 다 생존한 경우에는 크게 경하를 받았다고 한다. 불과 백년 전만 하더라도 오십대의 양가 부모 네 사람이 다 건재한 경우가 드물었다는 사실이다.
  문명의 이기들은 사람의 수명을 놀랍게도 이렇게 기적처럼 늘려놓았지만, 인간의 능력이란 본래 온전치 못하다. 욕심이 앞 다투어 리드하는 문명과 이에 뒤질세라 쫓아가는 개인의 삶은 자연의 천리를 거스른 결과  스스로 결함의 테두리안에 갇히게 되었다.
   꽃잔치 흐드러진 이 봄날에 느닷없이 달려든 소식, 매모그램에서 발견된 작은 좁쌀 몇 개가 조직 검사 후에 암으로 판정이 났다. 마른 하늘의 천둥은 하늘 깨지는 소리를 냈고 이어 퍼붓는 소나기가 피륙 찢는 소리를 냈다.
   거리에 지나가는 사람의 네 사람 중 한 명은 암을 극복했거나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 사실로 내가 암에 걸렸다고 해서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난 사흘을 천둥과 먹구름의 소나기 속에서 시달렸다. 그러니 난 나를 몰라도 한참 몰랐다. 얼마나 두꺼운 위선의 껍데기를 쓰고 입버릇처럼 오래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는지를.
   어차피 물러갈 먹구름도 사라지고 결국엔 그칠 소나기도 멈췄다. 흙탕물의 소용돌이 속에 쓰잘데 없는 것들을 다 떠내려보냈다. 다시 개인 하늘에서는 밝은 햇볕이 내려쪼였다. 잔디의 푸른 색이 한결 곱고, 새벽을 여는 새소리는 더 맑고, 구르는 손자의 웃음소리도 한층 더 크게 들렸다.
   이런 소식은  꼭 알려야 할 사람에게 알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니나 이제는 차분하고 담담하게 전할 수 있겠다. 그들의 놀라움을 나의 의연함으로 다독이고 잠재우면서

   Dropbox 창업자 Drew Houston 2005년 모교 MIT의 졸업식에서 인생의 컨닝 페이퍼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그는 24살 때에 인생의 날수가 30,000날이라는 기사를 보고 큰 깨우침을 얻었다고 했다. 그 때, 이미 자기는 9,000일이나 써버렸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고 반성하듯 자신에게 내가 뭐하느라 이 많은 시간을 다 썼지?”라고 냉정하게 자신에게 되물었다고 했다. 이 깨우침이 오늘의 그를 만들었으리라.
   내가 만일 팔십까지 살면  2,200, 구십을 산다고 하면 6,000일이 남았다.  생각해보니 쓰잘데 없는 걱정으로, 생각 없는 게으름으로, 가당치 않은 허영심으로, 소견머리 없는 불화로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했는지 모르겠다.
   암은 다행히 비교적 착한 암의 초기라 생명의 위협은 없으리라는 소견이 뒤이어 나왔다. 난 안도와 감사의 눈물로 내가 오래 살기를 희망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싫다고, 아니 좋다고 한들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 놀랄 일도 아닌 일에 심신을 소진 시킬 일이 아니다.  길던지 짧던지 다만 내게 허락되는 소중한 나날을 감사하고 목전에 있는 모든 것을 힘껏 사랑하며 살리라 다짐한다.
   연속적인 수년동안의 가뭄을 해갈시킨 강우량으로 천지는 꽃잔치가 한창인 이봄, 떠도는 구름처럼 흐르는 물처럼 흔적 없이 스러질 오늘의 소생의 소회를 확실하게 적어둔다.  03/10/19


Drew HoustonMIT 졸업식에서 한 연설


2019년 3월 2일 토요일

걸음마를 시작하며





2019년 3월 2일자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난에 실린 글입니다.



걸음마를 시작하며


   필기 도구를 챙겨서 책가방을 들고 집을 나선다. 돋보기를 쓰고 책을 끼고 씨름하듯 읽는다. 눈을 비비고 더듬거리며 컴퓨터의 자판을 두드린다. 지금 나는 돌아서면 깜빡거리는 기억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쓰면서 걸음마를 시작하고 있다. 글짓기 수업이다.
   학창시절에 나는 수학과 과학을 좋아하던 학생이었다. 기하와 물리의 성적은 언제나 우수했고 화학과 수학은 나에게 쉬운 과목이었다. 음악은 좋아한 반면 미술은 싫어했고, 역사는 오로지 시험 때에 달달 외웠다가 그냥 잊어버렸고, 작문 시간은 몸을 비꼬는 참으로 곤혹스러운 시간이었었다.
   장년을 넘어서면서 어느 때부터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전혀 무관심하던 것들에 조금씩 이해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싫어하던 미술인데 그림공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다 들기까지 했다. 예전 같으면 가당치도 않았을 무용에도 마음이 갔다. 하와이 민속무용을 잠깐 배울 기회가 있었는데 몸을 움직여서 이야기를 풀어내고 무엇을 표현하는 일이 매력적이고 흥미로웠다. 국악이나 한국무용을 배워볼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역사의 흥망성쇠 속에서도 무궁무진한 묘미를 느끼고, 그 안에서 철학을 배우며 하나님을 만나기도 한다.
   난시가 심해서 책을 읽으면 골치가 아퍼서 명작만을 골라서 의무감으로 읽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의 가장 즐기는 일이 되어버렸다.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 전혀 새로운 꿀맛 같은 재미와 아름다운 색깔들을 보게 된다. 그러다보니 제일 흥미도 없고 재능도 없다고 생각했던 글쓰기까지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런 변화들은 아마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키우는 중에 나도 함께 자라서 예전에 다 채우지 못한 부분들이 메워지면서 생기지 않았나 싶다. 긴 세월의 삶 가운데서 다양하게 부디치고, 반응하고, 적응하는 동안 나의 미숙한 부분들이 종합적으로 계발되었나보다. 하긴 모든 학문, 아니 문학은 특히 인생 자체에 그 과제와 해답이 있는 것일 테니까.
   내가 여태까지 살아온 나와는 좀 거리를 두었던 다른 것들에 흥미를 느끼고 좋아하게 되는 일은 결국 좀 더 온전한 한 인격체로 나아가는 증거라고 믿고 싶다. 새로 시작한 걸음마의 노력이 살아오며 마음 바닥에 가라앉은 회한의 찌꺼기들을 하나씩 퍼 올려서 거르고 바래고 날려버리는 작업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좀 더 가벼워지고 싶다. 지난 날의 시행착오로 부디치고 깨어진 눅눅한 삶의 조각들을 꺼내어 좀더 성숙한 눈으로 다시 바라보기를 원한다. 이것들을 따뜻한 햇볕과 시원한 바람에 말리어 차를 만들어 마시면서 삶의 향기를 다시 음미하고 싶다. 맛은 떨떠름해도 향기는 일품이리라.
   나는 지난날 미처 깨닫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인해 최선을 다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후회스러운 순간들이 많이 있었다. 뒤늦게 시작한 걸음마지만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내게 주어진 시간들을 색칠하는 일에 성심을 다하리라 마음먹고 있다. 바라기는 고운 단풍으로, 아름다운 노을빛으로 내 삶의 끝을 장식하여 아름다운 유산으로 사랑하는 남겨진 가족들에게 남기고 싶다.

   멀고도 먼 길을 걸음마로 시작하는 일이 힘겹고 때론 나를 지치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성급한 욕심을 내려놓고 보면 나에게는 분에 넘치게 감사한 일이다. 그리고 살 맛나는 신나는 일이기도 하다. 아직 성취한 것이 없어도 주위에서 받는 격려만으로도 행복이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