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2월 6일 금요일

달가운 형벌




이 글은 1919년 12월 6일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란에 실린 글입니다.






  나이 들어서 이사를 한다는 일은 어렵기가 형벌 수준이다! 평소에 려온 과분욕심오지랖으로 쌓아놓적체된 무절제의 무게감당하자니! 소리가 절로 난다.
   셋째 손자를 보면서 아들네와 합쳤던 살림을 내가 다섯살이 어서 다시 나누었다. 아들네와 함께 살던 집을 매물로 내놓으면서 스테이징을 했다. 얼마의 가구와 대부분의 이삿짐을 미리 창고에 옮겨서 집을 널찍하게 보이도록 잘 정돈했다. 집이 팔리기까지 석달동안을 별 불편없이 잘 견디었다. 그러고 보니 창고에 보낸 물품들이 없어도 좋을만 했다.
   이사를 하고 창고에 두었던 이삿짐이 도착했다. 없어도 좋을것같던 그 짐들을 하나씩 풀면서 버릴까 말까 망서리며 고심했다. 대부분이 그에 묻은 사연과 애착으로 버리기 힘들었다. 다시 이 구석 저 구석 쑤셔 넣느라고  또 고심을 하고있다.
   이 아파서 오래 서있지 하는 나는 이걸 다 정리하려면 당한 시간이 걸릴게다. 기억력까지 가물 가물해서 들었다 놓았다를 반복하면서 "걸 어디다 었더라?" 내가 버렸나? 두었나?”ㅎㅎㅎ   더우기 나처럼 무얼 만들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살림이 산뜻하고 간단하지 못하다. 자재를 모아놓고 공구와 장비를 구비하다보면 작업장을 따로 갖추지 못하면 복잡할 수밖에 없다.   물질이 귀하던 시절에 태어나 늘 부족한 가운데 자란 나는 아들 며느리와 달리 모든 것이 귀하다. 새집에서는 필요 없다고 려고 내놓았던 램프 스탠드너무 아까워서 슬쩍 갈무렸다가 가져왔다. 멋지게 장식된 무쇠 주물로 된 램프 스탠드의 받침과 폴대가 고급스럽고 스테인드 그라스의 쉐이드도 예쁘다. 전선을 뽑아내고 삼단의 높이를 1, 2단으로 줄이고, 쉐이드에 흙을 담아 그라운드 커버를 심었다. 아직은 리를 내리는 이지만 자라서 게 늘어지면 독특하고 멋진 운치를 연출하여 예쁠 것하니 물주기도 즐겁다.
   이렇게 재활용해서 만든 물품, 아니 작품들은 무척 애착이 가고 볼 때마다 마음에 소소한 기쁨을 건네준다. 누가 보고서 칭찬이라도 해주면 기쁨은 배가된다. 이러니 아마도 내가 살아있고 수족을 움직이는 동안은 내 주변의 복잡함을 면키는 어려울 것 같다.      이제 지난 사년, 삼대에 걸친 신세대와 구세대의 부비고 부대끼던 대가족, 누군가 하나는 성내고 삐치고, 누군가 한둘은 싸우고 울고, 누군가 하나는 병이 나서 아프고, 그 자글자글 끓던 모듬냄비의 어우러진 진국의 은 더 이상 다. 대신 남편과 아옹다옹? 시간이 더 아졌다. 남편은 정리를 천히 하자하는데 나는 숙제내고 싶어 조바심이. 하지만 라주지 못하니 바쁘다.
   이것이 내게 꼭 필요한가? 닦고 쓸고 어루만지면서 이 물건으로 내가 진정 행복한가를 물어본다. 그냥 예쁘니까 또는 값지고 좋은 것이니까 라는 이유로는 두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가 가져서 즐길 수 있도록 추려내었다.
  법정 스님과 같이 무소유를 실천할만큼 초월하지 못한 나는 몸의 기능이 감당하는 만큼만 욕심도 허영심도 부려야한다. 수시로 정다운 손길과 눈길의 교감을 나누는 물건만 남겨야 한다. 손과 발이 닿지 않는 오지랖도 접어야한다. 그래야 형벌 수준의 무게를 끙끙대면서도 달갑게 짊어질 수 있다. 돌아보며 감사할 여유도 생긴다.
  



2019년 11월 22일 금요일

램프 스탠드를 재활용 화분으로


셋째 손자를 보면서 아들네와  합쳤던 살림을 막내가 다섯살이 넘어서 다시 나누었다.
새집에서는 필요 없어 버리려던 램프스탠드를 슬쩍 갈무렸다가 가져왔다.스탠드의 받침이 무쇠 주물로 무거워서 바람도 타지 않고스테인드 그라스로 된 쉐이드도 예뻐서 화분을 만들고 싶었다.
먼저 전구를 빼내고, 전선을 뽑아내고, 모두를 분해했다. 
삼단으로 되어있는 길이를 
일단, 이단으로  줄여서 다시 조립했다.


쉐이드와 폴대 사이에서 물이 새지 않도록 
안에 비닐봉지를 잘라서 깔아 물이 폴대 안으로 흐르도록하고
흙을 채웠다. 

이 식물은 가늘고 긴 꽃대가 나와서
끝 부분에 자잘한 꽃을 피우고는 
그 자리에서 잎과 뿌리가 생기면서 포기를 형성한다. 
거기서 또 꽃대가 자라나와  다시 포기를 형성하면서 
이단 삼단으로 늘어진다.
생장력이 좋아서 흙과 물이 풍부하면 잘 번지고 번창한다.

이 식물은 그라운드 커버로 사용하는 식물인데 
잎이 자잘하고 반짝이면서넝쿨처럼 길게 자라니까 
밑으로 늘어지면서 자라 운치를 더할 것이다.

이것은 쉐이드가 못쓰게 되었다.
폴대를 아주 없애고
키를 낮추고 화분받침으로 쓰던 접시를
접착제로 붙여서
펠리칸 두마리를 얹어놓았다.

이렇게 내 손으로 직접 만든 재활용품, 아니 작품들은
유별한 애착이 가고
볼 때마다 마음에 뿌듯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누가 보고 칭찬이라도 해주면 기쁨은 배가된다.

2019년 11월 7일 목요일

삶의 균형





2019년 11월 11일자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란에 '균형 있는 삶을 사는 지혜'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삶의 균형


   균형, 발란스! 참 아름다운 말이다. 우리는 훌륭한 예술작품 속에서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조화된  균형을 볼 때에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한다.  균형이 깨지면 아름다움도 망가진다. 우리의 삶도 그렇다. 삶의 균형이 깨지면 불안해지고 행복은 그 찬란한 빛을 잃어버린다.

   둘째 손자가 카타리나 섬에 다녀 오는 날, 집에 들어오면서 검지를 치켜들고 우는 시늉을 했다. “아우 아퍼! 독수리가 내 손가락을 물었어요!” 고추세운 검지 손가락 위에는 날개를 활짝 편 독수리가 부리를 박고 손가락 끝에 얹혀있다.
   기념품으로 사온 이 독수리는 무게 중심이 부리 끝에 모여있다. 독수리의 외양으로 보면 부리는 제일 앞쪽이고 몸체는 뒤에 있어서 부리 끝에 무게 중심이 있을 것 같지 않다. 완벽한 무게 중심을 부리 끝에 두고 뾰족한 위에 오뚝 균형을 잡고 선 독수리의 묘기가 신기하게 보여 호기심이 발동하고 재미있었다.

   우리는 어쩌면 걸음마를 배우기 이전부터 애써서 균형감각을 키워간다.  외줄을 타며, 평형을 유지하지 못하면 떨어져내릴 위험을 안고 비틀거려야 하는 광대처럼, 위험천만한 곡예를 멈출 수 없이 감내하며 이 세상을 살아간다.
   삶에서의 균형은 물리적인 평형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데에 있다. 개인적인 기호와 의무를 사회적인 인종, 문화, 관습,  종교, 철학의 관념에 어떻게 안배하고 접목하는지에 따라서 다양한 삶의 형태를 이루어간다.
  체력은 팔과 다리의 길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하루는 24시간으로 제한되어있다. 하루 24시간을 어떻게 쓸지, 내게 허용된 물질은 어디에 어떻게 소비할지, 인간관계는 어떻게 형성해갈지. 순간 순간의 선택은 이어지고 합쳐져서 인생을 직조해낸다.  일차원도 아니고 이차원도 아니고 삼차원도 아닌 다차원의 복합적인 영향을 분별하여 선택해야 한다.
   올바른 선택은 궁극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만 그른 선택은 방향을 비뚤어지게 하는 요인이 된다. 허나 심사숙고할 충분한 시간의 여유가 없음에도 우리는 순간 순간 숨차게 밀려오는 선택의 발걸음을 멈출 수가 없다.  때로 우리가 절치부심 골머리를 싸매고 생각해도 모를 일이 종종 생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진퇴양난에서 끙끙대지만 시간은  동정심이란 눈꼽만큼도 없이 매정하다. 기다려주지 않고 달려가버린다.
   삶의 균형은 평형이 잘 잡혀야 하지만 평형은 평등하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수학적으로 균일하고 균등하다고 되는것도 아니다. 보고 느끼기에는 크고 무거운 일이 실제로 작고 가벼운 일에 중요성과 가치를 양보해야할 경우가 허다하다. 오히려 다양한 색갈과 크기와 비중이 어우러져서 대비와 대칭, 보완으로 잘 조화를 이룰 때에 균형을 이룰 수 있다.
   우선과 차선의 순위가 분명해야한다. 내가 좋아하고 하고싶은 것, 내가 싫지만 꼭 해야하는 것을 두고 면밀히 저울질 해서 선택하고 실행해야 한다.
   개인 삶의 균형이 깨지면 가정의 틀이 보루가 되어야 한다. 개인의 삶에 균형이 너무 크게 깨져서 그 파급이 가정의 보루를 넘어서면 사회가 보루가 되어야한다.  법과 제도가 필요한 이유다. 사회의 균형이 깨진 물결이 너무 거세면 나라까지 흔들리게 된다. 이에 균형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지 절감하게 된다.
   균형은 잘 잡아놓아도 세파와 풍파에 곧 밀리고 흔들린다. 흔들리지 않을 재간은 없어도 균형이 아주 깨져버리는 불행을 맞지 않으려면 개인에게는 가치관의 확립이, 사회에는 건전한 제도가, 국가에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이 요구된다.

   둘째 손자가 카타리나에서 사온 독수리 미니어쳐를 나무 젓가락 끝에 얹어보았다. 10도 쯤의 기울기로 이쪽 저쪽 기우뚱거리며 빙그르르 돌다가 오똑 멈춰섰다. 날개를 활짝 편 모양이라 마치 나르는 듯,  뾰족한 끝에 얹힌 모양새가 다시 봐도 신기했다.
  때로 큰 국난이나 사회적인 불안상태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불굴의 역경을 딛고 두각을 나타내는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이 나타날 때가 있다. 이런 위인들은 벼랑 끝에 서있을수록 밤하늘의 별처럼 길이 빛난다.  이들의 선견지명은 어쩌면 확고한 가치관의 정수를 한 눈에 알아보는 비범한 투시 역량이 있고, 이를 위해 다른 모든 것을 거침 없이 희생할 수 있는 결단력과 실행 능력이 있었던 결과이리라.

   나같은 범인은 개인 삶의 균형, 좀 더 나아가서 가정의 균형만 잘 잡아나가도 성공한 인생이다. 가정안에서만 해도 사랑과 존중, 격려와 타협, 책무의 분담, 비전의 공유를 잘 조화시켜 매끄럽게 꾸려나가는 일만도 벅찬 일이다.
   균형잡힌 가정에서 뿌려진 씨앗들이 대를 거르는 동안, 누가 알랴? 인류에 보탬이 되는 거목이 생성될지?

2019년 10월 17일 목요일

우선순위를 찾아라





2019년 10월 17일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란에 '혹시 이거 게임중독이 아닌가요?'라는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치매를 방지한다는 핑게로 신문에 나오는 수도쿠를  즐겨 했다. 신문을 버릴 때에  시간이 없어 하지 못한 것은 나중을 위해 모아두기도 했다. 이걸 보고 딸이 연필도 지우개도 필요없이 핸드폰으로 언제나 하고 싶을 때는 할수 있다고 가르쳐주면서 ‘2048’이라는 게임도  곁드려 전화기에 실어놓았다.
   가로 4, 세로 4칸의 사각안에서 손가락으로 밀면 모든 수가 그 방향으로 밀리면서 같은 수끼리는 합산이 되고 2 4의 새로운 수가 뜬다. 그러면서 점점 높은 수를 만들어가는 게임이다.

   병원에서처럼 잠시 기다려야 하는 동안에 멍하니 있기보다 이런 게임을 하기에 딱 좋다. 가볍게 시작했는데 2048에 도달하고 나니 재미가 붙었다. 멍때리던 시간에만 심심풀이로 하던것이 4096을 향해서 더 자주 짬이 날때마다 했다. 4096에 도달했을 때는 !” 하는 탄성과 함께 짜릿한 성취감을 맛보았다. 화면에 축하한다며 당신의 다음 골은 8192입니다는 글이 떴다. 순간 기쁨은 싹 사라지고 아득한 목표를 득달하는 게임의 상술이 얄미웠다. “이젠 고만 해야지작심하고 전화기를 꺼버렸다.
   얼마가 지나지 않아 무료한 시간에 자연스레 다시 하게 되었다. 어줍잖은 도전정신까지 꿈틀댔다. 과연 한계가 있는 사각의 좁은 범위 안에서 그게 가능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8192까지만 더 해보기로 했다.

   평소에 사행심이 없다고 자부해 왔던 나인데 이상하다. 밤에 잠이 잘 오지 않으면 슬그머니 머리맡에 전화기를 당겨서 ‘2048’을 한다. 처음 4096에 도달했을 때에 짜릿하던 맛은 이미 없다. 자주 그에 도달하고 8192에 도달해서도 아하 여기까지도 되는구나!”  하는 정도다. 다음 목표는16384라는 문구를 보자 이번엔 가는데까지 한번 가보자는 배포 큰 마음이 생겼다.
  높은 수에 도달하기까지는 수천 번의 손가락 움직임이 있은 후에 이루어진다. 게임에는 함정의 복병이 깔려있으므로 수가 높아갈 수록 같은 수를 만들어 합산하기가 어려워진다. 가다가 그만 간단한 실수로 인해 게임이 종료된다. 그러면 큰 낭패감을 안고 다시 시작해야 한다.
   초기단계에서는 실수를 만회할 기회가 여러 방법이 있지만 수가 높아질수록 움직이지 못하는 부동수가 늘어서 활용 칸수가 줄어들어 실수가 용납이 안 된다. 용의주도하게 몇 수 앞까지 치밀하게 생각해 우선순위를 찾아야 하는데 이 게임은 2 4의 합산으로 초간단 하다는 장점이 맹점이다. 타성에 젖어 자칫 실수가 되면 단 몇 수 후에는 게임이 종료된다. 간단한 실수임으로 다음에는 잘 할 수 있겠다는 허망한 희망이 또 생긴다. 어처구니 없게도  다시 시작한다. 바보같이!

   이걸 어쩌나게임에 열중하다가 중학생 손자에게 들켰다. 높은 점수의 기록을 보고 경이롭다는 듯 크게 놀란다. 그냥 웃어주었지만 내심 가슴이 뜨끔했다. 높은 점수가 그냥 나오지 않았으니 그만큼 많은 시간을 쓰잘 데 없이 허비한 까닭에 부끄러움이 앞섰다.
   치매예방을 핑계로 시작했지만 게임에 집착하다보니 중독이 되면 오히려 치매를 불러오는 사태가 생길까 우려까지 되었다. 일단 높은 점수에 이르면 머리에 산소를 공급하고, 눈도 쉬기 위해서 멈추었다가 나중에 다시 하는 것이 좋은데 그게 안 된다. 눈이 마르고 머리에 쥐가 날 정도로 집착이 되어 계속하게 된다. 중독성의 무서운 마력이다.
   이 게임은 돈이 들지 않고 언제 어디서나 손만 뻗으면 전화기로 손쉽게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오히려 화근이다.  그렇다고 고득점으로 무엇이 생기는 것도 없다. 그럼에도 손 쉬운 성취감으로 말초적인 희열을 느끼는 매력에 속수무책 빠져드는 어리석음!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그만둘 수 있다는 핑계로 더욱 더 깊이 빠져드는 자기 기만!
   일단 이쯤에서 멈추어야겠다. 혹여 나중에라도 손자에게 떳떳하게 할 말을 할 수 있기 위해서라도!  전화기에서 ‘2048’을 아예 지워버렸다.

   우리 인생도 이 게임처럼 우선 순위의 가치를 잘 찾아내어 실수 없이 실행해 나가야 후회없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게다. 타성에 젖어 헛수를 둔다든지 말초적인 희열을 따라 가면 자충수로 얼마 못가서 결국은 되돌릴 수 없는 판세가 되고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는 없으니!

2019년 9월 20일 금요일

아름다운 발




2019년 9월 18일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 난에 '아름다운 발레리나의 발'이란 제목으로 실린 글입니다.

    



   지인이 인터넷으로 '아름다운 '이라는 제목의 글을 보내왔다. 아름다운 ? '아름다운 '이라고 하면 실제 적으로 아름답게 생겨서 길고 하얀 손이라든가 솜씨 좋은 유명 화가의 손을 생각하게 된다. 상징적인 의미로 인격적인 또는 인정적인 손길을 생각하게도 된다. 그래서 '아름다운 '이라고 하니 실지로 예쁘게 생긴 사실을 말하거나 아름다운 행적의 발길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제목의 글을 클릭하자 먼저 사진이 화면에 . 사진에는 발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나는 얼굴을 그렸다. 어쩌면 이렇게 오스럽게 흉측…. 생전에 이렇게 찍하게 이상한 발을 적이 없다.
  발가락 마디마다 불거지고 꾸덕살이 기형으로 붙어있다. 얼른 화면을 바꾸려다 제목이 생각나서 다시 마음을 바꾸어 사진 아래 실린 글을 봤다. ‘ 발은 귀병을 있는 사람의 발이 아닙니다'라고 시작했다. 글을 읽고 나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감동의 가슴을 누르고 다시 사진의 발을 한번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발은 한국이 세계적인 발레리나 강수진의 발이다. 하루 열아홉 시간씩, 일년에 천여 레의 토슈즈 떨어지도록 연습에 정진 했다고 한다. 거의 인간의 한계에 도달한 수준이다. 그녀의 뛰어나게 수려한 미모에 반하여 완전 반대로 대비되는 모양새다.

   발레리나가 끝으로 서서 사랑과 욕망, 갈등과 분노, 절망과 희망같은 극적인 삶의 여정을 동동걸음으로 표현할 때에 우리는 아름답게 정제된 애절함으로 그녀를 쫓으며 가슴을 콩닥거리다가 슬픔에 겨워 울기도 하고 가슴 벅차게 웃기도 한다.
   발레리나가 가벼이 공중을 높이 떠올랐다가 사쁜히 내려앉으면 우리는 인간의 날고 싶은 근원적인 욕망을 성취시켜주는 희열에 마음속에 솟구치는 기쁨과 요동치는 감격을 느낀다. 그러나 토슈즈 속의 그녀의 발은 극한의 고통을 침묵으로 버티고 견뎌내야만 한다.
   완벽에 가까운 극치의 아름다움을 표현해 내는 경지!
   그에 달하기 위한 수천만번의 피나는 연습!  
   각고의 고통을 지속적으로 받아낸 !  
   고통의 멍울이 뭉치고 다져져 옹이가 되어 흔적으로 남았으니 어찌 발을 아름답다 하지 않을 있을까?
   고도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겠고 세계적인  명성이 그냥 어지는 것이 아님을 누구나 미루어 짐작할 일이지만 그녀의 의지와 집념에 감탄하지 않을 없다.
   그녀의 발은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이를 성취한 의지의 발판이 되었다. 토슈즈 속에서 고통의 응어리가 뭉쳐 그렇게 변형되면서까지 끝끝내 인내와 성을 다했다.
   발레리나로는 세계 최고의 자리에 고령의 나이로 현역을 감당했던 그녀의 신조는 내일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저 오늘을 충실히 최선을 다한다이다.


 전혀 아름답게 생긴 발은 아니나 생각사록 진정 눈물겨운, 아름다운 발이라 말하지 않을 없다. 잠시 보기도 꺼려 피하려했지만, 내용을 알고 다시 바라보니 경의의 입맞춤이라도 보내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