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0일 금요일

효부

이 글은 2003년도 미주 한국일보 
신춘문에 수기부문에서 
가작으로 상을 받은 글입니다.


나는 한국 근우회로부터 광복 50주년 기념 어머니날 행사에서 공로자를 표창하는 중에 효부상을 받았다.

그즈음 나는 참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는데, 내가 어느새 나이가 들어 갱년기에 들어선 것을 생각지 못하는 상태에서 여러 증상에 시달리고 있는 중인데다 더하여 미국에 와서 한가지만 오랫동안 해 왔던 사업이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감당 못할 큰 손실을 보게 되었고, 또 불경기로 해서 부진하게 되니 할 수 없이 사업을 정리 해야만 했었다. 이에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변화를 감당하느라 나의 심리 상태와 정서는늪속에 빠져있는 것같이 불안정한 상태가 되어있었다. 이일만 해도 힘이 겨운 이때에 어머니에게는 치매가 시작돤 것을 나는 또한 미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날마다 사건을 만드시고 가정에 폭풍을 불러 일으키시는 어머니를 잘 모시는 일이 참으로 나에게 찌르는 가시 같이 힘들어 졌고, 어떻게 하면 내가 찔리는 이 아픔을 모면 하는가에 급급하고 있을 때에 느닷없이 효부상이 주어졌다.

효부상을 받은것이 맷돌짝을 이고 다니는 것만큼 무거웠다.

나는 평소 내가 전혀 효부라고 생각지 않았을 뿐 아니라 효부가 되고 싶지도 않았었다. 어머님의 기대하시는 효부의 그림과 아들의 생각 속에 있는 효도상이 나에게는 너무나 수긍 할 수 없는 구석이 많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한 지붕 밑에서 엮어지는 아주 조그만 일들에서 조차 서로 상치 되는 고부간의 갈등과 가치관의 차이들을 내 앞에 맡겨진 의무로 알고 열과 성을 다하여 잘 해 보고자 노력하는 가운데 얼마를 지냈다. 그러다가 어떻게 해결 하는 방법이 없을까하여 여러 가지로 궁리하고 모색하기도 하다가, 그 다음에는 길어야 얼마 길겠는가 생각하여 참는 수 외에는 다른 더 좋은 방법은 없다고 단념했었다. 겉으로는 참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고 잘 실행되고 또 습관처럼 되어갈 무렵에 오히려 내 속에서 자꾸만 같은 자리에 맞는 매가 멍든 자리를 때리는 것같이 더욱 예민하게 찌르고 아파오고 참는 것이 좋은 방법이 아닌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다음엔 나는 자꾸 생각하게 되었다.

효도라는 명분으로 내게 강요되는 그 모든 노력과 희생이 과연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인가? 아! 그러면 나는 이렇게 자꾸 찌그러지고 썩어가도 되는 것인가? 효라는 개념을 옛날의 무조건 식에서 벗어나 어떻게 정의하고 정리해야 하는 것인가? 나 자신부터 효의 개념을 정립하여 기준을 세워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리고 끊임 없이 속에서 울려 나오는 양심의 소리와 누르고 밟아도 다스려지지 않는 욕구의 갈등 속에서 해방되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어머님은 어려서 일찍 어머니를 여위셨기 때문에 자라면서 충분한 사랑을 받아 보지 못했고, 혼자 되신 아버님과 동생들을 힘겹게 부양 해야 했다. 그래서 강한 책임의식과 시대적으로 어려웠던 그 시절의 모진 고생의 기억이 남아 있으신데다가, 남편 되신 우리 아버님도 먼저 보내시고는 늙으막에 끝으로 남겨진 두 남매를 길러내셔야 했다. 

온 생을 아들에 대한 기대로 살아오신 어머님께서는 사랑으로 덮어야만 하는 커다란 상처가 있는듯 아들의 사랑을 처절하게 갈구 하셨고, 남자로서는 흔찮게 정 많은 남편은 그 어머님의 기대를 너무도 잘 앎으로 어머님께 칭찬 받기를 어린이 같이 즐거워 하면서 온갖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섬겼다. 말수 없고 표현하지 않는 아내의 속 사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늘 자기의 성에 차도록 나에게 요구를 해왔다.

어머님은 다른 옛 분들이 거의 다 그러하신 것처럼 남성 선호 사상이 투철 하다고 할 만 하다. 나는 딸을 먼저 낳고 다음해에 아들을 낳았는데 처음 딸을 낳았을 때에 어머님의 실망이 아주 크셨다. 내가 나중에 아들을 낳은 후에야 이모님들이 하시는 말씀에 의하면 어머님께서 “평생 그러-어케 섭섭하기는 처음이다” 라고 하셨단다. 지금도 나는 가끔씩 남편에게 내가 아들 낳지 못했으면 쫏겨났을 꺼라고 말하면 남편도 아마 그랫을꺼라고 수긍을 한다.

연년생인 남매를 키우면서 아들과 딸을 너무 구분하셔서 아들 손주에게는 모든 일에 두둔을 하셨다. 한 살 위이기는 하지만 똑같이 애기이고 똑같은 어린애인 손녀에게는 너는 누나니까 양보 해야 하고 너는 누나니까 참아야 한다고 늘 불공평한 판단과 처사로 일관해 오시고, 누나가 그까짓 것을 가지고 뭘 그러냐고 오히려 나쁘다고 나무라신다.

고추 달지 못한 설움은 다섯째 딸로 태어난 막내 시누이가 제일 많이 겪었다고 언제나 열을 내고 토로 한다.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할머니처럼 나이 많으신 어머니가 아들만 위하는 그 그늘에서 항상 젊은 엄마들이 싸 준 멋쟁이 도시락 찬이나 급속히 성장 하는 문화 경제 사정에 따른 친구들의 최신 의복들이 늘 부러웠다며, 자기는 어머니에게 여자이기 때문에 사람 대접 받지 못하고 자랐었노라고 섭섭함을 표현할 땐 나도 하고 싶은 말을 삼킨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여자이면서도 또 며느리야!” 

맏며느리 보시고는 마음에 들지 않아서 일찍 분가를 시키셨다. 조석 식사 후에 며느리가 설거지를 해 놓으면 다 꺼내어 다시 하시곤 하셨다니 어찌 서로 마음이 편했으랴. 타협을 모르시고 마음에 담아두지 않는 항상 당당하신 어머님 성격에다가 유별나게 깨끗하시고 부지런 하시며 또한 힘도 좋으셔서 지칠 줄 모르시니 남의 사정을 알 바 아니라고 적극성을 펴시면 딸들도 무두 고개를 저었었단다.

큰아들과 약간 소원하신 대신 작은 아들을 무척 사랑하셨고 맏며느리 공궤를 못 받으신 어머님의 나에 대한 기대가 상당하서 아직도 나는 그 감당을 다 못하고 항상 채우지 못한 숙명의? 숙제의 분량으로 허덕이는 중이다.

초여름 어느 토요일의 일이다. 어머님은 날아갈 듯 고운 한복 차림으로 당신의 친정으로 나들이를 가셨다. 이모님의 생신이다. 평소에 나도 내 손으로 애기 목욕을 한번 시켜 봤으면 하고 바라던 나는 옳타구나 하고 그 동안에 얼른 남편을 부추겨서 아들의 목욕을 시킨 적이 있다. 한번 해 보고 싶어도 좀처럼 기회를 갖지 못했기때문이다.

어쩌다가 따님네 생신 잔치엘 가시던지 어머님 친정엘 가셨을 때에도 점심 드시고 천천히 얘기 나누시다가 저녁거름에 오시겠거니 생각하고 나는 아이들과 점심을 먹고 나서 어머님 안 계시는 핑계로 설거지 쌓아둔 채로 발 뻗고 잠시 누워 있으면 어느새 두시쯤이면 벌써 돌아오시는 성미시다.

집에 들어서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물 데워라 애기 목욕시키게” 하시는게 아닌가. 꼭 무슨 잘못을 들킨 것 같은 기분으로 목욕을 시키었노라 대답하고는 섭섭해 하시는 어머님의 투정 같은 꾸중을 들었던 적이 있다.
“내가 어련히 시켜 줄까봐 그새 시켰어?” 

손주를 보시고서는 어머님은 나날이 커가는 아이 기르는 즐거움이 크셨고 어쩌다 내가 할머님의 무절제 사랑이 염려되어 아이를 나무라면 낳기는 네가 낳았어도 네 아이 아니라고 생떼를 쓰시고 온갖 정성을 다 쏟아서 키우시면서 “내가 저거 책가방 메고 학교 가는 것 볼 수 있을까?” 라고 말씀 하셨었다. 이 아이가 커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치고 장가도 갔고 조금 있으면 증손 보시게 됐다.

지금 연세가 구십오세이신데 혈압이 조금 높으시기는 하시지만 아무데도 아픈데 없으시고 지난번 피검사 한 결과를 보고 담당 의사는 “허! 올림픽 선수 같잖아!” 라고 했으니 증손 책가방 메고 학교 가는 것 보시는게 그리 어려울 것 같지 않다. 그때의 그 말씀을 엄살을 넘어 협박으로 들었던 나도 그때는 이렇게 오래 건강히 사실 것이라고 상상 할 수는 없었었다. 어쨋든 우리들은 누구나 다 한치 앞을 내어다 볼 수 없는 무지의 인생들이다.

1980년, 여섯살 일곱살이던 남매를 데리고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우리 부부는 혼신을 다하여 이땅에 뿌리 내리고 사는데 열중했고 건강하셨던 어머니께서는 집안의 초석처럼 우리 모두의 중심이 되어 주셨다. 우리 집안의 분위기는 언제나 할머니를 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서 가족간에 외식을 하려고 옷을 다 차려 입고 나섰다가도 할머니께서 귀찮아서 나가기 싫다고 너희들끼리 갔다 오라고 하시면 우리는 모두 옷을 벗고 나는 다시 저녁을 지어야만 했다.

한번은 여름에 독립기념일 연휴가 되어 가족이 캠핑을 갔다. 이민 일세들의 공통된 애환으로 우리 부부는 그때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고 사업처에서 좀처럼 빠져 나올 수 없던 때다. 좀처럼 만들기 어려운 이 기회에 아이들과 함께 자연을 만끽하고 돌아오리라고 밤을 새워 준비하고 채비를 하여 짐을 싣고 떠났고, 뜨거운 사막을 하루종일 달려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선 천막을 치고 저녁을 어둡기 전에 서둘러 지어 먹었다. 내가 설거지를 하고 잠자리를 정돈하는 동안 자기전에 할머니께 인사를 드린다고 공중전화를 찾아서 전지를 켜 들고서 남편과 아이들이 어스름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피곤한 몸을 눕히고 하늘의 총총한 별을보며 흰눈을 이고 있는 산 봉우리에서 내려오는 냉냉하고 신선한 숲의 냄새를 깊이 들여 마셨다. 아! 얼마나 좋은가 이 생기 넘치는 청량한 싱그러움! 그러나 할머니와 통화를 하고 돌아온 아이들과 남편은 내일 아침 집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닌가.? 집에 혼자 남아 계시는 할머니가 너무나 쓸쓸하실것 같아서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덥기 전에 떠나기 위하여 이튿날 일찍 일어나 짐을 싸서 돌아오는데 다른 식구는 미련이 없는데 나는 어찌나 마음이 무겁고 아쉽던지!


이제는 하던 사업도 다 정리 되었고 아이들도 다 곁을 떠나 갔다. 고깔 씌운 말처럼 앞만 보고 달려온 나는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을 만나서 앞으로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 해야 했고, 지나온 삶을 또한 돌아 보게도 되었다. 어리석고 미련하게 코 앞만 보며 지나온 삶이 아득하고 먼데, 김 빠진 현실에 주저 앉아 미래를 생각하니 희뿌연 안개 같이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빈손으로 다시 생활 전선에 뛰어 들어야 하는 강박관념에다가 구십오세에 치매가 상당하신 어머님의 수발을 들어야 하는 현실의 짐만 무겁고 힘겹게 느껴지고 앞이 보이지 않으니 답답했다.


시간은 현실을 무거-업게 끌고 흘러갔고 하나님은 지루하게 나의 미련함을 바라보셨고 지혜의 뿌리를 벋고 자각의 싻을 틔우는 것을 기다려 주셨다.


이번에 아들은 대학원 졸업식 후에 곧 이어 결혼 앞두고 있다. 그래서 며칠 시간을 내어 부모 곁에 있어 주겠다고 해서 딸도 휴가를 좀 내라고 청하여 온 가족이 다함께 며칠을 꿈같이 지냈다.

고등학교 졸업 후의 여름방학을 마지막으로 집에서 보낸 뒤엔 두 아이가 차례로 집을 떠나 동부로 대학엘 갔다. 그 후로는 여름 방학에도 일하여 돈을 벌거나 전문직의 경험을 쌓고 크레딧을 받기 위하여 무보수라도 일을 하게 된다. 그리고는 여름 방학이 끝날 즈음 개학하기 바로 전에 일주일 정도 집에 오는 것이 고작이고, 연말이 되어 성탄절에나 일 주일쯤 집에 오는 것이 일년에 두번 정해진 일이다. 그러니 이제는 저들에게는 부모 집에 오는 것이지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다.

처음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선 집을 떠나 부모 곁을 떠나는 것을 해방감으로 기대하며 부풀고 의기 양양하게 자신의 성년을 자만하면서 자기만의 독단적인 생활을 꿈꾸며 떠나간다. 그러나 곧 시들은 풀잎 마냥 풀 죽어서 집을 그리워하고 향수에 젖어들다가, 친구들도 사귀고 서먹하고 낯설은 학교 생활에 점점 익숙하게 되면 앞 일을 꿈꾸고 설계하고 달려가기 바빠서, 저들에게는 현실과 미래만이 저들 앞에 크게 부각 되어가게 된다. 저들의 지나간 과거의 흔적들은 점점 희미해지는데 비해, 부모인 나는 그들과 함께 한 모든 자취와 지나온 세월이 큰 비중으로 나를 묶어 놓고 있음을 어쩔 수 없다.

아무렴 날개가 다 자랐으면 날아야지! 날아 가야지!
날아라! 날아가라! 마음껏! 푸른 하늘로! 


내일 새벽에 아들이 먼저 떠나고 딸은 다음날 떠나게 되어있다. 내일을 위하여 일찍 자라고 채근을 했어도 늦도록 이야기들을 하다가 자정을 넘어 각방으로 들어간 후다. 나는 아침을 위한 간단한 준비를 해 놓고 거실을 지나 이층으로 가려다가 아들이 가지고 가려고 준비 해 놓은 가방 위에 무슨 종이쪽이 있는 것을 보고 집어 들어 보았다. 낮에 한국 마켓에서 장을 보고 나온 뒤에 딸이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내일 떠나는 동생을 위하여 사온 배와 포도 등 과일 통조림과 한국 과자들의 영수증이다. 집에 왔다 갈 때에는 친구들을 위해서 늘 한국적인 먹거리를 사 가지고 가는데 시간이 없어 준비 못한 동생을 감안하여 딸 아이가 산 것들이다.

“아유 깍쟁이 같이 이렇게 꼭 받아야 하나? 내가 대신 주어야지” 하면서 영수증을 집어 내 주머니에 찔러 넣다가 문득 머리가 확 트이는 생각이 들었다.
아아! ! 하나님도 그래서! ! 
저들에게는 서로 주고 받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부모인 나에게는 이렇게 생각이 되는 것을.!!.....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읽으신 아들 예수님은 우리에게

“손은 손으로 눈은 눈으로 갚으라”가 아니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고 하셨고 또한 요한 사도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 할지니라” 라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일러 주셨구나!

맨손으로 미국에 와서 별 기술도 없는 우리가 그래도 꽤 빨리 사업을 시작했고 잘 키워 나가서 한적한 외곽에서 아이들 키우는데 궁핍하지 않고 잘 살아왔다. 큰자본 들이지 않고 별 기술 없이 시작한 사업을 일구어 나가는데 왜 어려움이 없었으랴. 작은 데서 시작하여 천천히 커나가는 과정 속에 그때 그때 높고 낮은 장애들도 많았고, 다급하고 절실한 상황 속에서 부딪치는 당혹감에 위기를 느끼는 때도 많았으나, 하나님께 매어 달리면 때마다 적절한 것으로, 훗날 지난 뒤에 생각하면 두고 두고 감사할 수 밖에 없는 좋은 것으로 채워 주셨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성경책 로마서8장28절에 쓰여진 이 말씀은 오랜 세월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며 확인 되어진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밖에 없는 말씀이다.

지금의 내 눈에는 안 보이지만, 지금의 내 생각은 안 미치지만, 지금 이 시간의 나의 모든 상황은 내게 가장 좋은 것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인 줄 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힘에 부치고 겨웁더라도 사랑과 성실을 다하고자 노력할 때에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늘 그래왔던 것처럼 훗날에 기쁨으로 -하나님의 선-을 확실히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경험으로 얻어진 신념이다.

세상 만사가 다 그렇듯이 좋기만 한 것도 없고 또 나쁘기만 한 것도 없다. 아직은 그래도 능력 있는 나에게 주어지는 많은 기회를 어머님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꼭 우물 속에 갇힌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으나 오히려 어머님 때문에 얻어지는 많은 기회를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음을 알았고, 그래서 책을 읽고 틈틈히 글도 쓰고 꽃과 나무를 심고 가꾸며 컴퓨터도 익히고 요리와 음악과 무용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런 것들이야말로 전에는 나와 전혀 상관 없이 지나 왔고 또 내가 여태껏 바삐 살아오면서는 할 수 없었던 다른 방면의 일들이라서 내 사고와 삶을 더욱 충실하고 풍요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이 되고 있다.

마냥 어린애 같던 딸아이가 이제 좀 철이 들었나보다. 엄마도 이제는 좀 엄마의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나에게 성화를 댄다. 너무 할머니 위주로만 돌아가는 관심의 끈을 조금 느슨하게 하라고 자기가 보기에는 할머니 돌아가시면 엄마는 모셔야 할 또 다른 할머니를 찾아 나설것 같다고 한다. “노 노 노 노” 하면서 눈을 크게 뜨고 머리를 절레 절레 흔들었지만 하기는 다른 곳에서도 노인들을 뵈면 먼저 도와드릴 일부터 눈에 들어온다.

며칠 전에 교회에서 하는 가정사역 세미나를 들었는데 아주 많은 흥미를 느끼고 또 깊이 이해가 되었다. 평소에 감정을 표현하기보다 자꾸 생각하던 버릇때문에 나이를 먹고 보니 보이는것 외에 드러나지 않는 것들이 보이기도 한다. 바라기는 어머님 살아계시는 동안에 이 방면의 책을 더 읽고 기회 닿는대로 공부하여 건강한 균형잡힌 가정을 만들어가는 일에 보탬이 될수 있는 일을 하고싶다. 가정의 구성원의 지나온 삶들이 무의식에 남아서 현재의 생활에 보이지 않는 영향력으로 작용하고, 서로 그로인한 불균형과 불협화음으로 상처받고 불행하게 깨지는 가정이 얼마나 많은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봇물을 어떻게 가래로 막을까만은 젊은사람들에게 나의 지나온 삶에서 터득한 것들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나는 아직도 내가 효부라고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은 나는 효부가 되고 싶어한다. 나는 효부가 무엇인지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하나님이 내게 주신 내가 하나님께 받은 사랑을 전해 주어야 하는 가장 가까운 이웃이요,
가정 안에서 함께 아프고 함께 느끼며, 약하므로 먼저 싸매고 보호 해야하는 한 지체이고, 
나를 바라보시며 “나를 아느냐?” 하고 물으시는 하나님의 기대에 찬 얼굴이신 것이다 

때때로 불쑥 불쑥 털고 일어서고 싶었던 적이 있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날까지 어머님과 함께 하는 앞으로의 인생을 설계하는 것이 내게 그리 어렵지 않다
하나님께 효부상을 받기는 어렵겠지만! 

댓글 4개:

  1. 제 아내의 삶과 너무 닮아 놀랐습니다. 어머님은 년전에 돌아가셨고, 돌아보면 하나님뜻이 계셔서 훈련받은 것이라고 하는 아내의 고백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효부상을 받고 부담스러워 하던 모습까지도 같은지요. 평안과 기쁨이 넘치는 삶을 내내 누리시길 빕니다.

    지나다가 우연히 이 뜰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는데 자주 놀러 오겠습니다. 반갑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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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어마나! 참 놀랍고 반갑습니다.

    이곳에 들러서 이 글을 끝까지 읽어주신것도 감사하고 또 댓글을 달아주셔서 더욱 고맙습니다.
    꼭 어디에 쌍둥이 분신을 발견한 것 같은 기쁨이 드는군요. 그리고 참 궁금하기도 하네요.

    늘 강건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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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아, 답글을 달아 주셨군요. 포스팅을 다시 읽어보니 저희 첫 딸아이를 낳았을 때 제 어머님께서 병실을 들리셔서 아기가 예쁘다는 말 한 마디 없이 퉁명하게 아내에게 "수고했다!" 딱 한마디 하시고 뒤돌아서신 것, 어머님이 안 가시겠다고 해서 저희와 아이들만 4시간 걸리는 곳으로 휴가를 떠났는데 둘째날 전화연락중 "그러는게 아니다"라는 말씀을 하셔서 모두 짐을 싸서 바로 돌아간 기억도 똑 같습니다.

    물론 제 블로그에는 그런 글은 못썼지만... 이젠 정말 분신같은 느낌이 드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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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아니 이럴 수가!!
    한참을 허리를 못펴고 웃었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중간에서 곤란한 지경을 참 많이 당하셨겠군요!

    그러셨어도 사모님께 갚아야 할 빚을 많이 지신 셈이니 열심히 빚갚으시고 남은 여생을 행복하고 아름답게 꾸려가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옛 이야기하며 웃을 날이 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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