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22일 일요일

마추야마 여행기 2 - Dogo Hot Spring, Oju Castle

넷째날

오늘은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온천마을인 이곳에서는 유카타 위에 조끼나 마고자를 입고 밖으로 나다니는 풍습이 있다.
호텔에서도 그렇게 하기를 적극 권장했다.
감기가 아직 덜 회복된 장로님네와 일찍 헤어진 우리는 도고 온천엘 가보고싶었다.

도고 온센 혼칸 전면

 도고 온센 혼칸의 뒷면 왼쪽이 황제 전용 탕

도고 온센 혼칸의 측면
베란다가 있는 방이 탈의실 삼층은 특실

그래서  우리도 유카타를 입고  나가보자고  했더니 아버지가 좀 거북해 하시는 것을 내가 우겨서  유카타를 입고 게다를 신고 예의 그 걸음걸이로 온천으로 걸어갔다. 

도고 온센 혼칸은 이 마을의 중심이다. 온통 이 온천의 명성으로 인하여 전국에서 몰려오는 관광객으로 연중 항상 붐비고 그리고 외국에서 찾아오는 사람들까지 상당수가 되서 활발한 상권을 이루고 있다. 이 마을은 온천과 호텔과 기념품점과 음식점을 빼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정도다.
 여행객들의 피로를 덜기 위해 만들어놓은 무료 야외 족탕

 일본 전통 의상의 갖가지 차림 모형

 동심으로 돌아가서 
시계탑
이 시계탑은 매 정시에 아래 위로 늘어나면서 일본의 유명한 작가가 도고 온천을 배경으로 쓴 소설의 주인공들의 모형이 나오면서 그 모습 그대로 움직이는 공연을 하고 다시 제 모양으로 돌아간다.  지금은 정지한 상태.


 이 제과점은 옛날부터 황제에게 진상하던 집이라고 하며 어디를 가나 자주 눈에 띄고 공항이나 전국적으로 퍼져 있는 제과점이다.
양갱과 팥 앙꼬, 카스테라가 주종으로 모양이 예쁘다.

도고 온천은 삼천년의 역사를 자랑하고 역대 천황이 열번이나 다녀갔다고 자랑한다. 그래서 황실 전용 온천탕과 다실과 화장실이 따로 구비 되어 있어 관람을 시키고 있었다.
1894년에 재건되었다는  건물은 삼층구조로 되어 있는데 처음에는 화려하게 지어졌을 목조 건물이 160년 세월의 옷을 덧입고 고풍스러운 멋을 풍겼다.

입장료를 세가지로 구분하여 일반 주민들이 많이 이용한다는 대중식과 그보다는 관광객들이 좀더 편하게 즐긴다는 중간급과 제일 비싼 독실이 있다고 하여 의논 끝에 제일 비싼 독실의 표를 일인당 1,550원을 주고 끊었다. 제한 시간은 한시간 이십분이다.
일본말을 잘 하시는 동행한 장로님이 안계시니 답답했다. 말을 못 알아들으니 눈치껏 안내를 따라 여러 단계를 거쳐 이층으로 삼층으로 다시 이층으로 층계를 오르내리며 좁은 통로를 돌아 들어갔다.
옛날에는 화려하고 웅대하게 지어졌을 건물이지만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많은 사람들이 북적대며 이용하기에는 층계는 가파르고, 공간이 많이 협소하여 아주 옹색하고 후진 느낌이다.


독실이라고 하여 독실에 독탕이 딸려 있는 줄 알았더니 탕은 호텔보다 훨씬 후지고 남녀만 구분된 작고 볼품 없는 대중탕이고 단지 탈의실만이 독실이었다. 내가 잘못 알고 있었지만 속은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여기서 웃기는 일이 벌어졌다. 온천욕을 끝내고 탈의실에 돌아와서 낮에 산 바디 크림을 아버지의 등에 발라드렸다. 그런데 크림이 퍼지면서 고루 발라지지를 않고 이상했다.
내가 이상하다고 하니까 아버지가 뭐가 이상하냐면서 자꾸 듬뿍 넉넉히 많이 바르라고 거듭 독촉을 했다. 아마도 온종일 건조한 가려움증에 많이 시달렸던 모양이었다. 
등과 팔을 다 바르고나서 돌아서더니 내가 하는것이 못마땅 했는지 아버지가 손수 크림을 듬뿍 따르더니  가슴과 배 그리고 다리에 바르기 시작했다. 내가 이상하니 바르지 말라고 해도 막무가내다.
크림은 피부에 스미지 않고 마치 썬 스크린 로션을 너무 많이 묻힌 것 처럼 온 몸이 하얗게 석고상이 되어갔다. 바르기를 끝내고 유카타를 입었다.
그러는 중에 내가 손에 묻은 끈끈한 크림을 젖은 수건에 닦는데 손가락 사이에 작은 거품이 생기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이것이 비누라는 확신이 들어서  비누라고 확고히 말하니 아버지도 젖은 수건에 손을 닦아보다가 종업원을 불러 물어봤다.
그랬더니 그게 바디워시란다. 낮에 쇼핑을 하다가 편의점에서 로션을 사려는데 낯익은 로얄 불루색 병의 Nivea 의 상표가 눈에 띄었다. 전에 내가 미국에서 이 상표의 로션을  많이 이용했던 제품이다. 병에는 앞뒤로 모두 일본 말로 되어있고 앞에 cream care라고만 영어로 크게  써 있었다. 나는 의심도 없이 반가히 집어들고 사왔다.

결국 아버지는 유카타를 벗고 다시 온천장으로 들어갔다.
비누가 묻은 유카타를 뒤집어 입고 돌아와서는 피부가 너무나 매끈거리고 기분이 좋다고 하신다.ㅎㅎㅎ

너희들은 어떻게 지내니?


다섯째 날

같이 온 장로님은 아직도 좀 몸이 불편하시다. 은근히 걱정이 된다.

사흘의 도고야 료칸의  즐거운 경험을 마치고 애초에 예약한대로 온장로님이 묵고 계시는 야치오 호텔로 옮겼다.
여기는 온천이 참 좋다. 온천이 넓고 물도 따끈하다. 비누도 알지도 못하는 여러 종류가 많이 구비되어있다. 방에 화장실과 욕실이 딸려있지만 욕실은 사용하지 않을것 같다. 도고야에서는 온천이 있지만 한번 사용하고는 가지 않았는데 여기서는 아침 저녁으로 가야겠다.
도고야에서 제일 불편했던 것은 샤워를 할 때는 물론 아래층으로 내려가니까 불편했지만 밤에 화장실을 몇번씩 가는 나는 그때마다 유카타를 입고 긴 허리띠를  두번 돌려매고 가는 일이 좀 번거로웠다. 

일본사람들의 서비스 정신은 좀 과할 정도다. 야치오는 9층의 현대식 건물이지만 방은 여기도 다다미 방이고 실내구조도 일본식이다.
방에 들어오니 그리 좁지는 않으나 크지도 않은 방 가운데에 큰 탁자가 있고 다리 없는 등받이 의자가 두게 마주보고 있다.
어디서 자느냐고 물으니 밤에 사람이 와서 잠자리를 만들어준다고 한다.
탁자에는 네사람분의 다기와 얼음물 보온병, 뜨거운물 보온병이 챠려져 있고 안내하는 여자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차를 따라주고 말 안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안내말들을  시시콜콜 하고 갔다.
저녁 8시가 되니 두사람이 와서 탁자를 벽에 붙여 밀어놓고 숙달된 솜씨로 스폰지 삼단요를 펴고 그 위에  삼단 솜요를 펴고 시트를 덮고 이불을 꺼내서  커버 속에 넣어서 펴주는 퍼포먼스를 하고 갔다.

매일 아침에 방 청소를 하고는 이불을 개켜서 장속에 넣고 탁자를 가운데 옮겨 놓고는 저녁 8시가 되어야 시트를 가져와서 자리를 깔아 주는거다.
좀 더 일찍 자리에 눕고 싶어도 그럴 수도 없다. 동행한 권사님은는 시트를 매일 갈지 말고 사흘에 한번만 하라고 몇사람에게 부탁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그들의 임무를 충실히 이행하더라고 오히려 불편하다고 한다

 야치오에 와서 온천은 잘 즐겼는데 방에서 정체 모를 냄새가 심하게 났다. 창문을 열어놓으니 우리 방이 2층인데다 정원이 없이 건물 옆이 바로 길이라 소음이 나서 길바닥에 나앉아있는 듯하다. 그러나 그보다 냄새가  참 견딜 수 없이 심하게 났다. 그래서 아버지가 코를 잡고 찌프려가며 코믹 연기를  하면서 방을 바꾸어달라고 했더니 같은 이층에 방이 셋이 있는데 이틀 후에는 방을  또 옮겨야 하고 금연 구역에는 방이 하나도 없다고 했다. 일본사람들은 담배를 많이 피운다. 이 호텔 건물이 9층인데 그중 7층 한 층만 금연구역이고 나머지는 모두 가연구역이라고 한다. 
그러더니 가까운 다른 호텔을 알아봐줄테니 그리로 옮기겠냐고 한다. 거기는 다다미가 아니고 침대라 했다. 다다미방은 이미 경험을 했으니 그것으로 족하고 우리가 침대보다 다다미를 더 좋아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서 보고 결정하겠다고 하고 그 호텔로 가서 보니 도고 온센 혼칸 바로 앞이라 상가도 가깝고 식당들도 가까우니 편리하겠고 냄새도 안났다. 하지만 같은 값이라는데 가방을 펼쳐 둘 장소도 없을 만큼 방이 코딱지만 하고 온천도 없단다. 싫다고 하니 온천은 야치오를 쓰도록 해주겠다고 한다. 이 호텔과 야치오 호텔은 도보로 칠팔분 거리다.
이 과정을 거치는데 한시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우리의 말을 그들이 알아듣고 또 그들의 말을 우리가 알아들으려면  몇번씩  반복하고 수정해야 소통이 가능했다.
결국 가연구역이지만 냄새가 덜 나는 방을 하나 준비해놓을테니 오후에 확인해보고 옮기라고 하여 어렵사리 그렇게 합의를  하고 오늘의 일정에 들어갔다.
저녁에 돌아와보니 팔층에 있는 방에 공기 청정기를 틀어서 놓아두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담배 냄새가 좀 났지만 먼저방에서처럼 구토가 날 정도로  이상한 묵은 냄새는 없어서 이리로 옮기기로 했다.
우리 한국 사람이 마늘을 많이 먹어서 그 냄새가  오래 쩔으면  괴상하듯 일본 음식 냄새도 그렇다는 것을 알았다. 예전에 너희 할머니께서 일본 사람들에게서는 왜내가 난다고 하시더니 그게 바로 왜내였다.

오늘은 도고에서 전차를 타고 마추야마 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오주성을 다녀왔다. 온 장로님은 하루 더 쉬고 싶어 하셔서 우리만 다녀왔다. 


일본 사람들은 대체로 한국 사람보다 키도 작고 몸도 가냘프다. 역으로 가는 중에 아주 조그만 베이글집을 발견했다. 아직 아이 티를 못 벗은 듯한 작고 젊은 남녀가 둘이서 열심히 베이글을 직접 구워 팔고 있었다. 작지만 촌구석에서 꽤 세련된 발상이다.
이곳에 온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아침 점심 저녁을 일본 음식만 먹었더니 먹을 때는 맛있게 먹었고 아직 물리지도 않았는데 베이글을 한입 베어무니 불루베리 크림치즈의 향이 입안에 가득 퍼지면서 엔돌핀이 솟았다.

오주성은 아주 작은성으로 일본에서 제일 최근에 지은 성이라고했다. 
마추야마도 시골인데 여기는 시골의 시골이라 그야말로 변변한 상점 하나, 요기할 음식점 하나도 없는 곳이었다
성이 지어지고 성주가 살았을 때는 번화가였을 오십미터 정도의 골목길이 있는데 너무나 좁고 집들도 납작해서 꼭 세트로 지어놓은 것 같고 지금은 때묻고 우중충한 상점들의 대부분은 문이 닫혀있고 열린 상점들도 불을 킨 곳이 없고 상점을 지키는 사람도 없다. 물론 물건도 몇가지 안되는 변변치 않은 것들이다.
역에서  내리니 아무것도 눈에 뜨이는 것이 없어 두세 사람에게 물어서 이십여분 걸어서 찾아가는 동안 좁은 골목들을 누볏는데  정말로 조금도 변하지 않은 서민적인 옛마을의 모습들을 구경했다.

 성은 넓은 강을 끼고 자그만 야산에다 축대를 높이 쌓고 지었는데 강 건너에서 거리를 두고 볼때에는 주위의 평화로운 경치와 어울려서 산뜻하게 참 아름다웠다.  땀을 흘리며 어렵사리 찾아왔지만 마추야마 성을 본 우리는 막상 도착해서는 들어가지 않고 입장료를 아꼈다.

 마추야마 성에 비하면 너무나 작고 볼품이 없고 고풍스럽지도 않아 들어가서 관람할 가치를 못 느꼈다.



걸어오다보니 맨홀의 뚜껑이 이렇게 예쁘게 되어 있다.


일본사람들은 대체로 정원이나
가로수를 잘 다듬어서 정갈한
모습을 하고 있다.

화려함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한적한 시골길에서도 가로수는 잘 다듬어진 모습이다.
 오주성 앞에 있는 옛 가옥들
몇채 되지 않지만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는 
잘 보존된 옛가옥이다.

마추야마 여행기 1 - Matchuyama ( Dogo Hot Spring)



여행중 아들 딸에게 보낸 매일의 소식들


첫째날

아직 살아있기는 한 거냐고?

그래. 걱정을 많이 했겠구나!

잘 도착했다!
그런데 사실은 어제 하네다 공항에서 한번 그리고 마추야마 공항에서 두번째 메세지를 너희에게 보냈는데 이곳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으며 보니까 메시지가 전송되지 않았더구나. 그래서 다시 메일을 보냈는데 아마 그것도 안들어갔나보다.

우리는 하네다에 새벽 4시 30분에 도착해서 두시간 반을 기다렸다가 다시 비행기를 타고  마추야마에 아침 8 시에 도착했다. 마추야마 비행장에서 다시 버스로 도고에 도착한 것이 아침 아홉시경이었다.

버스 역에서 두리번거리다가 우리가 예약한 호텔의 위치를 물어보는데 한 재바른 택시 기사가 자기 택시를 타면 하루종일 타고 가고싶은 데를 다 가고 120불이라고 했다.  우리는 집을 떠난지 만 하루가 넘으니까 무척 피곤해서 빨리 샤워하고 쉬고 싶었지만 호텔은 오후 세시가 넘어야 체크 인이 가능했다. 그래서 그러기로 하고 택시를 타고 호텔로 가서 짐을 맡기고 시내 관광에 들어갔다.


여기는 역사깊은 고도지만 시골 벽촌을 겨우 면한 작은 마을이다.
그래서 더욱 속깊이 일본적?인 일본사람들의 진면목을 잘 볼 수 있었다.
먼저 우리가 묵을 호텔 도고야는 크래딧 카드를 안 받고 로컬 현금만 수령한다고 했다.  호텔이 이 정도니 다른 곳에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겠다고 생각한 우리는  당장 현금이 필요하니까  은행으로 가자고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여기에서는 '이요'은행이 제일 크다고 하며 한곳에 내려줘서  우리들 네명이 함께 들어갔더니 직원들의 눈이 커지면서 놀라는 눈치다. 자기네는 환전을 안하니 본점으로 가라고 해서 다시 나와서 본점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은 거의가 영어를 조금도 못한다. 아마 한국과 일본만 영어 배우기가 제일 어려운 것 같다. 다행히 온장로님은 일본어를 잘 하셔서 참 좋다.
본점에 가서도 돈을 바꾸는데 좀 어려움이 있었다.
무려 한시간이 넘게 걸려서 한 사람당 오백불씩만 바꿀 수 있었다. 한번에 한사람당 오백불씩만 가능하고 또 그것도 두번만 가능하다고 한다. 좀 어처구니가 없었다. 열흘이나 있으면서  호텔 숙박비까지 현금으로 내야 한다면 모자라기 십상이고 맘 놓고 즐거운 여행을 하기가 좀 어렵지 않을까 생각 되었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으니 나중에 무슨 수가 생기겠지 하면서 그냥 오백불씩만 바꾸기로 했다. 
사람들이 무척 친절하고 예의 바른데도 대화 상통이 잘 안되고 돈 바꾸는 절차가 얼마나 복잡하고 까다로운지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모든 절차는 단계마다 일일히 꼼꼼하게 기록하고 여러 단계의 상관에게 싸인을 받고나서 다음 절차로 넘어가고 그때마다 다시 싸인을 받으러 안으로 들어가서 우리를 기다리게 했다. 우리가 가져간 돈을 위조가 아닌지도 물론 꼼꼼하게 한장 한장 확인을 했다. 모든 절차가 끝나고 돈을 받아보니 두사람씩이니 천불을 바꾸어주면 좋을 것을 오백불씩을 환율에 따라 바꾸니 동전이 많이 나왔다. 그래서 간단히 생각하고 동전을 다시 지전으로 바꾸어달라고 천원을 만들어서 주었다. 그랬더니 무진장 기다리게 했다. 알고 보니  다시 네사람의 서류를 새로 만들어서 얼마짜리 지전 몇장, 얼마짜리 동전 몇개를 계산하여 일일히 적으면서 복잡하기 이를데 없이 만들어가지고 다시 결재를 받느라고 배고프고 지친 우리를 한참 더 기다리게 만들었다. 정해진 절차를 조금도 흐트리지 않고 자기 임무에 충실한 면은 좋지만 한편 너무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환율도 무척 야박했지만 우리는 지치고 배도 고픈데 다른 선택이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리는 하네다 공항에서 돈을 바꾸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택시 기사가 데려다 준 곳에서 일본식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옷감 짜는 수제 직조 공장을 둘러보고 마추야마 성 (송산성 - 높은 산성으로 시내 한복판에 숲이 우거진  가파른 산  꼭대기에 오래된 화려한 건축물)을 다녀왔다



이곳은 오늘 가지 말아야 할걸!
케이블 카를 타고도 계단을 많이 오르고 내려야 했다.
물론 우리는 파김치가 되서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 먹을 생각도 없을 정도로 지쳤지!


숙소에 들어와서 목욕을 하고 걸어서 십분쯤 되는 곳에 가서 냄비 우동을 먹고 들어와서 와이파이를 연결 하고 보니 너희들이 잘 시간이더구나.  지금 한숨 자고나서 유카타를 입고 다다미방에 앉아서 이 메일을 쓰고 있다

동행한 장로님은 오기 바로 전에 감기가 걸려서 병원엘 두번이나  갔었고 자칫 여행을 포기하려고까지 생각했었다고 한다. 아마도 우리 때문에 더 포기를 못 했겠지.

어제 무리를 했으니 오늘은 그냥 아무것도 하지 말고 온천하고 먹고 쉬려고 한다.

내일 보자!


셋째날

우리는 처음 동행한 장로님의 스케줄을 따라서 정한 도고야 료칸에서 사흘밤을 자고, 나중에 그 장로님이 화장실을 공동 사용 해야하는 것 때문에 변경한 이치야 호텔에서 나머지 6일은 함께 지내게 된다.

 도고야의 정문



관리를 최소한으로 줄인
일본식의 옆마당 모습



가옥의
뒷골목

이치야 호텔은 크고 현대식인데 도고야는 작고 낡은 오래된 일본의 전통식 건물이다. 처음에 이치야의 시설을 보고나서 도고야를 보니 낡고 후진 느낌이 들었다. 화장실이 방에 딸려있지 않은 것도 참 불편했지만 무엇보다 온천이 아주 작고 볼품이 없었다.
그런데 하룻밤을 자고나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다다미 넉장과 여덟장의 방을 터놔서 시원하게 넓고 나무를 많이 사용한 집 구조와 간결하고 소박한 실내장식이 편안한 느낌을 준다.
가볍게 여닫히는 미다지 문틀들도 기분이 좋다. 사면의 두 벽은 미다지 장지문으로 되어있어 꽉 막힌 벽 보다는 숨통이 트이는 편안함이 있으면서도 문 밖에는 복도가 있고  바깥 벽의 전면을 유리창으로 만들어서 햇빛과 시야를 가리지 않고 소음은 거르게 되어있고 보온도 되게 되어있다.
눈여겨 보면 문틀과 창살, 문고리나 잠금장치가 모두 작고 간결하면서도 성능이 우수하고 정밀하게 되어있어서  따로 어떤 장식품으로 치장하지 않아도 스스로 곳곳의 자리에서 훌륭한 장식품이 되고 있다.


문틀위의 방의 구분선인데
간결한 일본식 문양을 넣어
단조로움을 피했다.


대나무 가지의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장식
둘러보다가 눈이 이런 곳에
머물면 즐거워진다.














우리가 자는 방은 이층인데  숙달되지않은 우리는 걸을때에 조금만 방심하면 쿵쿵 소리가 나면서 집 전체가 흔들리고 삐거덕 소리가 나서 지진이 난 것 같이 된다. 그래서 옆방의 사람들에게 미안하게 되니 절로 움츠리며 행동을 조심하게 된다. 특히 유카타를 입어보니 가슴이 헤벌어지지 않도록 단정히 입으면 보폭이 좁아져서 흉내를 내지 않아도, 게다를 신지 않았는데도 절로 일본 여인들의 특이한 잦은 걸음걸이가 되는 재미있는 경험을 했다.

하룻밤을 자고도 정든 이유중의 또 하나는 무료로 제공되는 아침밥이다. 흰 쌀밥에 된장국에다가 반찬은 매실장아찌와 다시마채 , 그리고 손가락 두개 넓이의 김 몇 장이 다이고, 마실 것은 오차와 커피가 전부다. 그리고 모두 셀프 서비스이고 설거지도 자기가 해야 된다.


처음 이치야의 화려한 아침밥과 도고야의 아침밥을 사진으로 봤을 때에 도고야의 아침밥은 너무 초라해 보였고 더우기 밥을 많이 먹지 않으면 먹을 것이 없어 보여서 실망했고 전혀 기대를 안 했었다
그런데 기름기 자르르 도는 흰 쌀밥은 반찬 없어도 자꾸 목구멍으로 넘어갈 정도로 맛있고 두부와 어묵, 다시마,  버섯과 양파가 넉넉히 들어있는 된장국은  푹 빠지고싶게 시원하고 좋았다. 게다가 다시마채 볶음이 흰 쌀밥에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약간의 가미 양념된 파래김도 파삭하게 맛있고 평소에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매실 장아찌도 곰삭아서 맛있었다.
소박한 소찬이었지만 얼마나 정성이 많이 느껴졌는지! 그것도 공짜로 끼워 넣어주는 음식이!
내가 늘 음식을 하는 사람이지만 이렇게 먹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는 그런 음식 만드는 자세를 가져야 함을 더욱 새롭게 깨달았다.
살 찔 염려를 거두고 배가 부르도록 밥과 된장국을 두번씩  더 가져다 먹었다.
딱 두가지 반찬 

2015년 7월 4일 토요일

Brazil 여행기 5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깜깜하게 해가 져서야 이과수 Rafain Hotel에 도착했다. 객실이 여섯이나 여덟 개씩 붙어있는 이층건물이 널따란 잔디에 띄엄띄엄 늘어서 있었다. 분수대 앞 잔디에서 밝게 빛나는 남십자성을 바라보며 피자를 주문해 간단히 저녁을 먹었다. 남미 여러 나라의 민속춤을 보러가려면 시간이 넉넉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과수 폭포의 명성으로 워낙 관광객이 많은 곳이라 쇼를 하는 장소가  엄청나게 컸다. 남국의 미남 미녀들이 원색의 화려한 의상을 입고 나와서  정열적인 선율에 열정적인 춤을 추는 것을 관람했다.

25일-
6시 30분 기상하여 호텔에서 아침을 먹고 상냥한 이과수의 가이드와 함께 버스로 알젠틴 국경을 넘어 이과수폭포를 보러갔다. 일명 악마의 목구명이라는 이 거대한 폭포를 보기 위해 강의 지류를 열개를 건너는 이어붙인 긴 다리를 건너던 중 일 미터는 됨직한 이구아나를 보았다. 물위로 들어난 바위에 엎디어 사람들의 눈총을 개의치 않고 졸고 있었다.
물은 깊지 않았으나 이십분이나 걸려서 건너온 넓은 강폭의 물이 우묵하고 둥그런 절벽으로 몰아 떨어져 내렸다. 폭포 주위를 위에서 내려다보며 걷는데 거기서 솟아오르는 물보라로 우리는 온통 젖었고, 우뢰 같은 물소리로 귀가 멍멍해졌다. 구름사이로 숨바꼭질하는 강한 해를 따라 선명하고 고운 무지개가 여기저기 생겨났다.
다리를 다시 건너와서 오솔길을 따라 폭포 아래로 내려온 우리는 구명조끼를 입고 보트를 탔다. 보트는 우리를 태우고 폭포 가까이 다가가서 두 번이나 물보라 속으로 들어갔다가 돌아 나왔고 우리는 속옷까지 몽땅 젖었다.
첫 번째는 두려움에 움츠리고 눈을 감았으나 두 번째는 어차피 젖는다는 생각에 흠씬 즐겨보리라 마음먹고 소리를 지르며 눈을 뜨고 물을 맞으니 아주 재미있었다.
보트를 타고 하류로 삼십분 내려와서 앞뒤가 구분이 안되는 특이하게 생긴 트럭을 타고 열대 숲을 지나오며 가이드의 설명을 들었다. 성장이 빠른 굵은 대나무의 마디는 이십 인치도 넘을 것 같았다.

호텔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이과수 장로교회로 갔다. 정규모임이 있는 날이 아니라 그런지 현지인들이 좌석의 반쯤을 채웠고, 한인들은 많이 오지 않아서 섭섭했다. 어디에서나 누구든지 화려한 의상과 아름다운 선율의 하와이안 댄스에는 열광하는 모습을 보였다.

26일-
오늘은 이과수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새벽 5시 30분에 기상하여 가방을 꾸리고 check out. 브라질 폭포를 관광했다. 이과수 폭포의 메인폭포가 되는 악마의 목구멍은 지리적으로는 알젠틴에 있다. 그런데 알젠틴에서 수평으로 내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브라질 쪽에서 병풍을 바라보듯 입체적으로 감상하는 광경은 입을 다물 수 없도록 장관이었다.
폭포는 몇 마일에 걸쳐 있어서 폭포를 따라가며 계곡을 사이에 두고 숨바꼭질하며 오솔길을 걷노라면 수없는 폭포가 새로운 그림으로 다가왔다. 넓고 큰 폭포도 있고 가늘고 아기자기한 것도 많았다. 한 번에 떨어지기보다 지층의 단계를 이루어 이층 삼층으로 떨어지기도 했다. 이제 폭포를 다 구경 했나?라고 생각하면 모퉁이를 돌아가면 더 큰 규모의 폭포가 나와서 보는 사람을 새록 새록 감격하게 했다.
점심 후에 새 공원으로 갔다. 여러 종류의 열대지방 새들이 알록달록 원색으로 예쁜데 너무 커서 귀여운 맛이 적고 좀 무섭기까지 했다. 상냥하던 이과수의 미녀 가이사를 작별하고 3시 30분 발 비행기로 쌍 파울로 향했다. 많은 정보를 갖고 성심껏 설명하는 가이드를 우리는 의사, 변호사와 같이 가이사로 부르기로 했었다.
이과수 비행장에서 우리는 쌍파울로 가서 다시 비행기를 갈아타지만 짐은 직접 로스앤젤레스로 부친다고 했다. 우리의 모든 짐을 부치는데 시간이 참 오래 걸렸다.
잠자리를 바꾸면 잠을 잘 못자는 나는 떠나기 전날부터 잠을 설쳐서 피곤했다. 비행기를 타자마자 나는 깜빡 졸았다. 눈을 뜨니 허전한 느낌이 확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늘 목에 걸고 다니던 주머니가 없다. 의자 밑에 떨어뜨렸나? 엎드려 찾아보니 없다. 캐비닛에 올려놓았던 짐을 꺼내어 찾아봐도 없다. 비행기는 이미 떠서 날고 있고, 눈앞이 캄캄했다. 거기에는 면허증과 크레딧 카드, 썬 그래스, 카메라, 현금 사백불이 들어있었다.
할 수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와 함께하며 모든 일정을 주관하느라 얼굴이 반쪽이 된 박 목사님에게 말씀드렸다. 쌍 파울 공항에 내려서 이리 저리로 박 목사님을 졸졸 따라다니며 분실신고를 하고 기다렸다. 우리 모두는 거의 찾을 수 없을 거라 여겼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내 가방이 이과수 공항, 스크린 체크하는 곳에서 발견 된 것이 전화로 확인되었다. 쌍파울 공항에서 엘에이 비행기를 타려면 우리는 여섯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항공편이 없어 당일 찾을 수는 없었다. 면목 없지만 박 목사님께 부탁을 드릴밖에. 다행히 감사하게도 오월 일일에 LA.에 오시는 오 목사님 편으로 전해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쌍파울 공항에 누군가가 “아! 이제 또 밥 안 해먹는 곳, 어디 갈 데 없을까?”라고 말하여 모두가 까르르 웃었다.

27일-
평소에 소소한 일들을 자주 잊는 나는 스스로 은근히 걱정하던 차에 이번일로 마음이 내려앉듯 무거웠다. 점점 무능력자가 되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쌍 파울에서 밤 열두시에 출발하여 (비행시간 열 세시간) 다음날 아침 여덟시 십오 분에 로스안젤레스에 도착했다. 마중 나온 남편은 나에게 얼굴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그동안 볕에 타기도 했고, 또 피곤하기도 했고, 화장도 지워졌으니까 그럴 테지만 나는 야단맞을 일을 대비하여 엄살을 부렸다. “반쯤 죽었다 살아서 그래”라고 말하고 분실사고의 자초지종을 얘기 했더니 살아서 돌아온 것만 고맙고 좋단다.

눈을 감으니 꾀죄죄한 파라과이 원주민 어린이들의 커다란 눈망울이 떠오른다. 철저한 무관심과 소외 속에서 소망 없이 살아가야 할 저들에게 다가가, 사랑을 베풀고, 소망을 안겨주려고 눈물을 바치는 해맑은 젊은 선교사의 얼굴도 보인다. ‘어린이여 일어나라!’ ‘젊은이여 일어나라!’ 고 외치는 함성이 남쪽에서 점점 더 크게 들려온다.            060501

 악마의 목구멍


 흠뻑 젖어서도 밝은 웃음들을




 엉덩이 말리기










 이과수 장로교회에서

 누구나 좋아하는 하와이안 댄스

           폭포를 뒤로하고



2015년 7월 1일 수요일

Brazil 여행기 4

남쪽에서 들려오는 소리

23일-
오늘은 조동진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아순시온 장로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어있다. 오늘 그 교회의 기도원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여 버스로 한 시간을 달려서 시온기도원에 도착했다. 예배 중간에 평복차림으로 우리가 성곡을 네곡 불렀다. 교인이 성인만 백여 명이 되었다.
기도원은 이십 에이커가 넘는다 했다. 성전을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남녀 숙소가 길게 이어져 있고, 식당과 친교실 외에 부속건물이 몇 개 더 있었다. 나무숲이 있는 구릉 뒤로 묘지까지 딸려있다고 했다.
파라과이에 한국 사람들이 많았을 때엔 교회도 부흥하여 이렇게 큰 기도원을 마련하고 활발히 신앙생활을 했던 모양이다. 지금은 사업에 크게 성공하여 쉽게 사업을 거두지 못할 형편이거나, 아주 가난하여 길이 없는 사람들만 남아있고, 중간층의 사람들은 브라질, 한국, 캐나다, 미국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예배후 교인들과 함께 점심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다.
저녁 예배를 위해 어제의 반대색으로 드레스를 입고 양창근 목사님이 섬기시는 람바레 현지인 교회로 갔다. 작년에 있었던 교통사고의 참사로 인한 분쟁으로 항의 시위가 정문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했다.
우리는 버스를 뒷마당에 대고 뒷문으로 조용히 걸어 들어갔는데, 앞쪽에서 무슨 구호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이 무겁고 낯선 곳에서 느끼는 약간의 공포심도 생겼다. 모두 진지한 마음으로 기도했다.
집회가 시작되자 그들의 뜨거운 찬송과 열정적인 메시지는 민족성과 선교지라는 의식을 더욱 치열하게 느끼게 했다. 우리는 성가 여섯 곡과 핸드벨, 가곡 한곡, 그리고 하와이안 댄스로 끝마무리를 했다. 후에 양창근 목사의 사모님이 초대하는 숯불구이로 마음이 편치 않을 만큼 황송한 대접을 받았다. 우리는 보답으로 식사 후에 반주 없이 즉석에서 ‘오빠생각, 낮에 나온 반달, 고향의 봄’을 함께 불러드렸다.

24일-
새벽 다섯 시 반에 기상하여 짐을 꾸리고 아침을 든든히 먹고 다시 버스로 이과수로 출발했다. 여섯 시간을 가야 할 참이다. 파라과이에서는 제일 좋은 호텔이어서 힐러리 여사도 묵고 갔다는 좋은 곳을 우리는 별로 즐길 새 없이 떠나는 아쉬움이 조금 있었다.
쌍 파울에서 속을 썩이던 전화카드는 여기서는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나 여기는 컴퓨터실이 그냥 오픈 돼있어서 자유로 이 메일을 집으로 보낼 수 있었다. 쌍 파울에서는 통화는 못했는데도 호텔을 나오면서 통화료를 십 일불을 주어야 했다. 국제통화를 시도하면 연결이 안 되어도 로컬통화요금은 시도할 때마다 부과된다고 했다. 어처구니 없지만 말도 안통하고 내 기분과 시간만 아까우니 그냥 줘버렸다.
파라과이는 인구의 칠십 펴센트가 여자라 했다. 그런데도 젊은 남자는 자꾸 다른 나라로 빠져나간다했다. 교육이 부실하고 직업이 없기 때문이다. 그로인해 남자가 아주 귀하여 모든 노동을 여자들이 하고 남아있는 남자들은 그냥 놀고먹는 천국이란다. 자원은 많으나 위정자들은 부정부패로 물들어 있고 산업이 없으니 일자리도 없다.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나라라고 했다. 그러니 가난을 면할 길이 점점 더 없어보였다.

어제 갔었던 교회의 양창근 목사님은 이십여 년 전부터 원주민을 대상으로 사역하고 있었다. 작년에는 'Ariba Ninos(어린이여 일어나라)' 라는 주제로 전국적인 선교대회를 열었다. 양 목사님이 가르쳐서 선교지로 나간 선교사들의 각 지역 어린이들 팔천 명을 초대하여 대회를 치뤘다고 하니 그 사역의 열매가 얼마나 방대한지 알만 했다.
정부의 무관심속에 버려져있는 어린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앞날의 소망을 심어주는 일들을 정말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

여행할 때는 잘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기도 했지만 파파야가 달고 향기롭다고, 커피가 진하고 맛있다고, 복숭아 주스가 신선하다고, 욕심껏 먹었으니 뻔하지 않은가. 근데 문제는 도중에 들를만한 화장실이 없는 거다. 있어도 여러 사람이 볼일을 다 보려면 시간이 걸리게 마련이다. 옷을 화장실 안에서 단정히 입고 나왔다가는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혼쭐이 났다. 남자 화장실도 금새 여성전용으로 바뀌고, 어쩔수 없이 목사님은 남자 화장실 앞의 보초임무를 마다하실 수 없게 되었다.

파라과이 한국학교 강당에서다. 연주하는 도중에 며칠을 애 먹이던 소식이 갑자기 왔다. 이를 악물고 간신히 연주를 끝내고, 화장실을 찾아서 어둠 속에 치렁한 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달음질을 치는데 하필 그곳은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건너서야 화장실이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겨우 급한 고비를 넘기고 보니 종이가 없는 거다. 대책 없이 멍하고 있는데 때마침 구세주가 나타났다. 혼자서도 넉넉지 않은 것을 가지고 사이좋게 알뜰하게 처리했다. 그런데 나와 보니 수도는 있는데 물도 안 나왔다.

 나중에 이 가방을 잊어 버렸음

 강변의 빈민가와  붉은 흙

시온 기도원

 민속 공연

 민속공연 

노변의 묘지
묘석을 작은 집모양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