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4월 17일 미주 중앙일보 '이 아침에'에 실린 글
코비나 19의 비상령이 내려지기 전, 내가 소속된 일주일 주기로 모이는 그룹에서 모임의 계속 여부를 논의하는 과정에 여러 이야기가 나왔다.
평소에 자신감이 넘치는 한 사람이 “아니 뭐 그렇게 너무 위축될 필요가 있겠습니까?”고 했다. 이어서 “치사율이 그리 높지도 않고 또 인명은 재천인데 뭘 그래요?”라고도 했다. 대부분은 아직 그렇게 깊이 생각지 못했기 때문에 얼른 대답할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에 한 사람이 “메스컴에서 너무 호들갑스럽게 부추기는 것이 아닌가요?” 그러자 “그러면 나올 사람은 나오고 두려운 사람은 나오지 마세요!”라고 누군가 힘주어 잘라 말했다. 모두들 찬성하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적당한 의견을 못 내고 잠시 주춤했다.
중국과 한국의 상황이 더 이상 강 건너 불이 아니고 이 미국에서도 비상령이 내려지자 갑자기 불안해진 사람들이 사재기의 줄서기를 하고 있다. 상가와 회사, 학교도 문을 닫게 되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위급상황이 아니면 병원의 모든 예약이 취소되었다. 삽시간에 미국 전역에서 감염자가의 속출이 증가되고 날마다 사망자도 늘어났다. 모든 사람들과의 만남이 금지되었던 권고가 명령으로 바뀌었다.
나의 친구는 허리 디스크의 급작스런 악화로 거동이 불편하여 겨우 화장실 출입만 하면서 손꼽아 수술날을 기다리다 수술 취소 통보를 받았다. 이 사태가 언제 끝날지 아무도 모르고 또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 예측하는 지금, 실망이 크고 그 고통과 불편함은 이루 말 할 수 없다.
이는 우리가 그룹에서 모임의 계속 여부를 논의하던 시기와 불과 열흘 사이에 일어난 급격한 사태의 변화다.
지구촌이 한 손바닥 안에 소용돌이 같이 사람들의 이동 속도가 빨라지다보니 상상도 못할 미증유의 초현실적인 일이 이렇게 무서운 속도를 냈다. 생명을 담보하는 일이니 이것은 재난의 한계를 넘어 전쟁이나 진배 없는 상황이다. 개인에게도 칩거명령이 내려졌지만 나라들도 서둘러 문을 걸어 잠글 수 밖에 없는 지경이다.
현미경이 아니면 볼 수도 없는 지극히 작은 개체가 온 지구촌을 흔들어대고,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가공할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병은 치사율도 무섭지만 전염 속도가 더 무섭다. 그러니 한 발 미리 손을 써서 그 기세를 잡지 않으면 감당이 안 되는 지경이 성큼 다가와 덮치게 되고, 사람들은 속수무책으로 위험에 깔리게 된다.
그 어느 때보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이상한 시간이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아들도, 딸도, 손자도,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살 맛 안 나는 시기다.
단기간에 끝나지 않을 이번 사태로 인해 사회 전반에, 다방면에서 변화의 방향이 꺾이는 변곡점이 될 거라는 예상을 할 수 있겠다. 개인 삶의 자세도 많이 바뀔 것이고, 상권의 형태와 지각이 달라질 것이다. 국제적인 외교문제와 지향점도 변화가 있겠다. 이런 급격한 변화를 인지하고 수용하는 삶을 따라잡지 못하는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은 도태될 것이 자명하다.
무엇보다도 염려되는 것은 변화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지므로 그에 따른 선택과 결정도 단시간에 내려야 한다는 것이 문제다. 충분히 숙고할 시간의 여유가 없다. 마치 내가 나가는 그룹에서 모임의 계속 여부를 논의할 때만 해도 아무도 사태의 심각성을 명확히 파악하지 못했고, 그 후폭풍의 후유증을 어렴풋이나마 짐작도 못했던 것과 같다.
코로나의 질주가 아무리 빨라도 사람의 지혜를 능가하지는 못하리라. 그동안 감사를 모르고 누리던 것들에 대한 고마움을 묵상하자. 밖으로 뻗던 에너지를 안으로 향하여 내실을 다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그저 조용히 느긋하게 성찰의 시간을 갖다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